에픽 하이(Epik High) - Pieces, Part One 원고의 나열

에픽 하이의 다섯 번째 앨범은 그늘지고 축축한 면모와 활연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조금은 음울한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곡들을 마주하면 지난 앨범 <Remapping The Human Soul>에 내재되었던 기조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사운드의 외양 면에서나 메시지에서 하드코어 요소를 전면 배치한 장쾌하고 공격적인 노래에서는 앞의 감성과는 전혀 다른 씩씩함이 묻어난다. 이번 작품을 통해 어려움을 겪는 이들과 아픔을 나누고, 힘을 실어 주고 싶었다는 그들의 언사와 부합되는 부분이다.

감정의 접점을 찾고자 때로는 처연하게, 때로는 강인하게 모습을 즉각 변화하는 탓에 조금 혼란스러운 감도 존재한다. 각 노래가 보유한 정조(情調)를 기온으로 따져 그래프를 만든다면 비교적 고른 흐름이 아닌 영상과 영하를 일정한 규칙 없이 오가는 그림이 나올 터, 따로 흩어져 있기에 곡의 순번대로 묶어내기 어려운 심상의 전개는 하나하나의 곡이 아닌, 앨범 전체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함에 명확성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대표적으로 'Girl', 'The Future', 'Ignition'으로 이어지는 각기 다른 감성 체감온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사랑했던 연인을 추억하며 잊지 못하는 슬픔을 내비치다가 확장된 시선으로 자기가 아닌 조금 더 큰 면을 바라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행동을 하도록 의견을 개진한다. 그러나 다시 다음으로 넘어가서는 개인 상념에 경도되어 어둡게 과거를 돌이키는 순서를 밟으니, 이를 직감으로 정리한다면 영하, 영상, 영하로 옮겨가는 구도. 나에서 우리로 갔다가 나로 돌아오는 주체의 시선 이동 또한 어지럽게 여겨질 우려가 크다.

이러한 전환은 반대로 청취자들의 듣는 재미를 충족시켜 줄 때에는 순기능을 하기도 한다. 곡이 지향하는 대기에 따라 반주도 자연스레 그에 맞는 색으로, 메시지를 효율적으로 담아내기 위한 형태로 옷을 갈아입어 감상 시 지루함을 저감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일직선의 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면 자칫 평이해져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에픽 하이는 그러데이션(gradation) 형식의 아주 은은한 바뀜보다는 강약의 이미지를 도드라지게 함으로써 비트를 제일로 여기는 시대의 청취자를 배려했다.

힙합 뮤지션이라는 학습된 울타리를 허물고 흑인 음악적인 것 외에 다른 장르의 요소를 따와 교배한 것도 형식 전환으로 발생하는 즐거움에 일조한다. 전체적으로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 양식을 빌리며, 일정 부분 록과 팝의 얼개를 떼어와 색다른 맛을 가미한다. 완연한 트랜스의 틀을 갖춰 한밤의 클럽으로 듣는 이를 공간 이동시키는 앨범의 맨 마지막 곡 'One'의 리믹스 버전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이틀곡 'One'은 사운드 면에서 상당한 재미를 제공한다. 일렉트로니카의 강성 장르인 테크노를 중심축으로 두었지만 80년대 유행한 신스 팝의 요소도 차용하고 있으며, 일렉트릭 기타로 미약하게나마 기력을 유지한다. 후반부에 들어서는 스트링 프로그래밍으로 클래식적인 접목을 시행, 전자음 구성으로 딱딱하게만 들릴 부분을 침착하게 보강했다. 전작들의 타이틀곡인 'Fly', 'Fan'과 상당히 닮아 있는 게 사실이지만 한층 섬세하게 정제되었음이 예전 곡들과 구별되는 매력이다.

침투력 강한 신스 루프로 트렌디한 힙합을 완성한 'Breakdown'과 '연필깎이', 세차고 날카로운 프로그래밍으로 메시지에 더욱 힘을 싣는 'The Future', 아트 오브 노이즈(Art Of Noise)의 'Moments In Love'를 떠오르게 하는 'Decalcomanie', 하드코어 힙합의 화끈함과 박력이 그대로 전해지는 'Eight By Eight' 등은 마니아들에게 어필하기 좋은 곡이다.

반면, 윤하가 보컬로 참여한 '우산'은 힙합을 숭배하지 않는 이라도 누구나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노래다. 사물에 대한 감각적이고 예쁘장한 표현들로 연결된 이야기는 한 편의 순정만화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고, 도입부와 중간에 삽입된 빗방울 떨어지는 효과음과 간소한 어쿠스틱 느낌의 반주, 밑면에 깔리는 오케스트레이션이 쓸쓸하게 남은 사랑에 대한 기억 한 구석을 아련히 자극한다. 거기에 윤하의 절제된 음성이 잘 융화되어 다수에게 어필할 것으로 보인다.

타이틀곡처럼 하이브리드 상(像)을 띠지는 않지만, 다른 곡들이 지닌 거센 모습은 없지만 '당신의 조각들'은 그 조근조근함에서도 막대한 힘이 느껴진다. 첫 번째 버스(verse) 중 문장이 아닌 단어로 종결되는 '당신', 그와의 기억에 대한 은유는 이 앨범에서 서정성이 극대화되는 파트다. 그럼에도, 절대 말캉하게만 들리지 않는 이유를 한때 방패와도 같은 존재였지만 세월에 쇠해진 그에게 이제는 화자 자신이 힘이 되어 주고픈 의지가 서린 노랫말에서 발견 가능하다. 그래서 '당신의 조각들'을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가 되고 싶다는 앨범의 중심 줄기를 가장 부드럽게 압축, 요약한 곡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주변인들이 겪는 초통(楚痛)에의 동감을 드러내는 유약한 기운, 긍정적 의욕을 회복할 수 있게끔 어루만지는 언어가 버무려진 앨범은 은근한 힘을 갖는다. 굳이 구원이라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될 이타적 발상은 연숙한 편곡 기술력의 병행으로 더 높은 접근성을 보유하게 됐다. 다음에 이어질 또 다른 '조각들'이 기대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2008/05 한동윤 (www.iz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