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고 육중한 비트가 랍티미스트를 나타내는 색이라고 한다면, 이번에는 그 색이 조금 흐려졌다. 바랜 것이 아니라 카멜레온이 주변 환경에 맞춰 자기 몸빛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그도 자신의 둘레에 있는 여러 분위기에 동화하려는 노력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첫 앨범에서의 하드코어 함을 내세우기 위한 의도된 과장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모양을 내는 작법을 획득했다고 말할 수 있다.
랍티미스트는 케이오틱스(K-Otix), 브레일(Braille), 아미 오브 더 파라오즈(Army Of The Pharaohs) 크루 등 미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뮤지션들과 작업하며 바다 건너에까지 이름을 알린 프로듀서. 소포모어 앨범은 본토에 뒤지지 않는 하드코어 힙합의 정수를 선보임으로써 마니아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처녀작 <22 Channels>(2007)보다 더욱 부드러워졌기에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평이 나오게 된다. 이는 그가 올해 초, 소울 컴퍼니 레이블에 둥지를 튼 후, 힙합에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회사의 공포되지 않은 기조에 일정 부분 동의했음을 방증하기도 한다.
전작을 경험한 이라면 으레 1990년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킬 양식을, 걸걸한 래핑에 금방이라도 한 대 후려칠 태세의 훅이 매력인 그런 음악을 수록했을 거라 생각했겠지만 내용물은 그 예상을 산산조각 낸다. 레이디 제인(Lady Jane), 샛별, 이경선의 나근나근한 목소리를 빌려 톤을 올리니 이미 '랍티미스트 표'라 할 요소가 사라진 것. 심하게는 그가 하드코어 힙합과 결별한 것처럼 느껴진다. 여성 보컬을 게스트로 들인 노래들이 늘어나서 그럴까, 음반 내의 채도도 훨씬 밝아진 듯하다. 탱고를 접목시켜 이국적인 매력을 발하는 'Amnesia', 건반 리드가 화사함을 띠고 여러 타악기의 사용으로 리듬감을 살린 '널 사랑한 내가 밉다'는 과거와는 180도 확연히 다른 모습, 거의 그룹 프리스타일(Freestyle)의 음악으로 여겨질 정도, 이쯤 되면 방송 입성이라도 계획한 건 아닌지 의심마저 든다.
물론, 단단한 매무새가 단번에 숨을 죽인 것은 아니다. 귀에 쏙 들어오는 억양으로 훅을 꾸민 'Triple Flow', 매드 크라운(Mad Clown)의 날카로운 래핑이 변주되는 비트에 실려 강한 힘을 내는 '이빨', 뜸지근한 반주로 어두운 공기를 형성했지만, 짧게 마디를 나눠가며 랩을 해 속도감 있는 전개를 나타내는 'D.A.R.K' 등은 약간 순화되긴 했어도 듣는 즉시 랍티미스트가 제조한 음악이라 판단 가능하다. 여전히 장쾌하고 남성적인 드럼 루프가 유유하게 넘실거린다.
수록곡 중 가장 큰 인상을 남기는 곡은 아마도 대신 가사를 써주는 이의 애환을 재미있게 풀어낸 'Ghostwriter'일 듯싶다. 키비의 깔끔하면서도 악센트가 확실한 스토리텔링이 간결한 반주에 잘 들어맞아 듣는 재미를 상승시켜주는데, 내용에 빠져들어 '얼마나 얄미울까?', '얼마나 속상할까?'하는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이나 액션 활극에 어울릴 연주곡으로 서두를 장식하는 '금메달리스트'는 은은하게 스트링을 깔아 고급스러운 멋을 발산한다. 쓸쓸한 감성으로 나지막하게 부르는 '갈증'은 오랜만에 팔로알토(Paloalto)의 목소리를 접할 수 있어 그의 팬들에게는 무척이나 반갑게 들릴 것 같다.
하드코어가 아닌 유순한 음악으로의 방향 전환, 예상치 못한 급작스런 변신이 당혹스러운 이도 많겠지만, 작품은 한국을 대표하며 나라 바깥으로 진군하는 프로듀서답게 매끄러운 바운스를 자랑한다. 여기에 담긴 잘 정제된 노래들은 데뷔작과는 또 다른 기쁨을 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감성 모드로 돌입한, 그리고 자연스러운 모양내기에 반절 이상 성공한 새로운 랍티미스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2008/05 한동윤 (www.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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