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R&B 필드의 포문을 연 작품, 솔리드(Solid) - The Magic Of 8ball 원고의 나열

돛을 펴고 있는 배만이 바람이 불 때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그들은 한 번의 실패로 돛을 내리지 않았으며 노력과 뚝심으로 키를 꼭 잡아 방향을 잃지 않고 그들만의 음악을 선보일 수 있었다.

정재윤, 이준, 김조한 세 명의 재미교포로 구성된 그룹 솔리드(Solid)의 데뷔작은 한마디로 망한 앨범이었다. 방송출연은 달랑 한 번이요, 음반도 출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쏙 들어가 버렸다.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Deux) 등 막강한 랩-댄스 그룹이 활개를 치던, 시각에 호소하는 것도 중요하던, 90년대 초반의 가요계에 춤을 추지 않는 힙합 그룹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좁기만 했다. 그게 이유가 아니라면 이들이 체득한 사운드스케이프가 우리의 가요 토양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혹독한 수업을 마친 후 솔리드는 그들의 이름답게 더욱 '견고'해졌다. 정재윤은 미국의 동네친구로서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던 대만 출신 댄스 그룹 엘에이 보이즈(L.A. Boyz)의 세 번째 앨범 <Ya!>(1993)에서 동명의 타이틀곡 'Ya!'의 작사에 참여하며 주목을 받았고, 공일오비 5집 수록 곡 '단발머리'에서 김조한은 비트박스를, 이준은 유려한 랩을 선보여 결정타를 날리며 건재함을 알렸다. 이제야 대중들은 솔리드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집 같은 2집으로 돌아온 그들의 주무기는 R&B였다. 리듬 앤 블루스의 기초위에 한국인의 정서를 고려한 멜로디 라인, 김조한이라는 출중한 보컬리스트를 앞세운 전술은 잘 들어맞았다. '이 밤의 끝을 잡고'의 스매시 히트로 불게 된 솔리드 돌풍은 그때까지도 알앤비에 익숙하지 않은 전파매체를 강타했다. 바비킴은 이 곡에 대해 “한국에서도 이런 음악이 되는구나, 한국말로 힙합을 해도 음악적으로 괜찮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솔리드는 단숨에 한국의 보이즈 투 멘(Boys II Men)이라는 호칭까지 얻게 되었으며, 1집이 재발매 되는 현상까지 일으켰다. 본토의 색채가 굉장히 짙었던 전작에서 감독을 맡은 장호일과 비교하여 두 번째 앨범에서는 작곡가 김형석의 참여 덕에 우리나라 정서에 맞는 분위기와 선율, 그것과의 접점을 찾기 수월했으리라.

그러나 김형석의 참여가 앨범의 색깔 결정과 직결된 것은 아니다. 랩과 턴테이블 연주에서 출중한 재능을 보이는 이준, 우리나라 최고 기량의 보컬 김조한, 그리고 그 중심에서 정재윤이 곡을 만들고 서로의 장점들을 살려 배합, 주조하는 탁월한 프로듀싱 능력이 더해져 이들 음악의 진가가 드러났다. 대중적으로 가장 크게 성공한 2집을 비롯해 모든 앨범에서 작, 편곡 및 프로듀싱을 맡은 정재윤은 힙합, 알앤비 뿐 아니라 타 장르 음악의 주된 흐름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 예로, '슬럼프'에서는 라틴풍의 브라스 연주를 프로그래밍 하여 외국의 라틴 하우스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강렬한 업템포의 댄스 트랙을 선보였는데, 후렴구보다는 비교적 사운드의 비중이 약한 버스(verse) 부분에 코러스를 배치해 부족한 면을 채우고 있으며 이준의 스크래치로 역동성을 더해 댄스곡으로서의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는 댄스곡 '넌 누구니'도 큰 차이 없는 진행을 보이고 있다. '왜'는 90년대 초중반 듀스, 공일오비(5집 수록곡 '마지막 사랑')에 이어 우리나라에 뉴 잭 스윙(new jack swing)을 선보인 곡으로 시류에 민감한 정재윤의 센스를 엿볼 수 있다.

'Yo, man. I don't think that heard you. What you tell'em, what you name it' 뒤이어 나오는 함성. '나만의 친구'는 방송과 당시 음지의 댄스 씬을 한껏 달군 노래다. 한국의 척 디(Chuck D)로 비유되는 이준의 묵직한 저음 래핑과 전반에 깔린 올드 스쿨 사운드의 차용으로 수수한 힙합 향을 느낄 수 있으며,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Jam'과 비슷한 연주 형식을 띠는 경쾌한 브라스 파트는 듣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레 몸을 들썩이게 한다. 거기에 더해 간주에서의 아카펠라, 짤막한 스크래치, 비트박스 협연은 입체감으로 다가서고 후렴에 들어가기 전의 두 마디 베이스 프로그래밍은 흥미로운 긴장감을 조성하니 이 노래는 대중성과 특종의 기교를 관통하는 클래식 격 힙합이라 하기에 충분하다.

솔리드의 힙합에 대한 열정은 데뷔 앨범의 'Party people', 2집의 'Hip hop nation', 4집 <Solidate>의 'If you want my loving', 'Pass me the mic'에서 드러난다. 최근에 들어서야 우리나라 힙합에서도 샘플링이 작법의 하나로 널리 쓰이고 있지만 그것의 효용을 애초에 기록한 것은 솔리드의 음반이었을 것이다.

'Party people'에서는 브레이크비트와 씨앤씨 뮤직 팩토리(C+C Music Factory)의 'Let's get started'를, 본 앨범의 'Hip hop nation'은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의 명곡 'Atomic dog'을 샘플로 쓰며 신스 펑크(synth funk) 스타일의 힙합을 들려주었다. 자칫 조잡해 보이는 결과를 낼 수 있는 과정이지만 이 샘플들이 사용된 솔리드의 노래들은 단단한 마름질로 말끔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본 앨범은 솔리드를 대한민국 대표 알앤비 그룹으로 만든 작품이 아닌가. 김조한은 일단 목소리가 좋다. 그 울림은 가는 듯하나 단번에 터뜨리는 힘이 강하다. 거기에 기교까지 훌륭하니 단연 리드보컬이고, 정재윤은 코러스와 버금 보컬로 거들며, 이준은 특유의 저음을 살려 보이즈 투 멘의 마이클 맥캐리처럼 베이스와 내레이션의 포지션을 담당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앨범 내의 알앤비 발라드곡 '이 밤의 끝을 잡고', '어둠이 잊혀지기 전에', '아끼지 못했던 사랑'은 멤버들의 화음도 빼어나지만 코러스의 배열이나 전체적인 편곡 역시 탄탄하며, 작사가 김혜선의 노랫말로 아름다움과 서정성을 겸비한다.

이 앨범은 솔리드가 알앤비, 힙합의 정수를 잃지 않으면서 대중성을 확보한 시발이었으며 3집, 4집 수록곡들에 일정한 흐름(곡의 분위기와 작법)을 갖추게 한 작품이기에 큰 의의가 있다. 이들이 해체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짧았던 5년간의 활동은 언젠가 이들이 다시 뭉쳐 더 멋진 음악을 들려주리라는 기대감으로 더욱 생생하다.

2006/07 한동윤 (www.izm.co.kr)


덧글

  • 땅콩 2008/09/16 21:06 #

    솔리드 1집의 제목도 까먹은 노래 가사가 아직도 안잊혀져요 "삐삐는 정말 편한 기계이지만~~" 김조한씨의 부드러우면서도 어색한 한국 발음이 저 가사를 발음했을때. 정말 뭐라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는데 ^^;;;;
  • BlueCT 2008/09/17 07:59 #

    저 당구볼 지팡이 정말 부러웠었죠. 저거 들고 랩하면 괜히 뽀대가 날 듯한...- ㅂ-)/
  • 느릿느릿 2012/07/05 21:10 # 삭제

    나만의 친구 도입부 가사를 찾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기 적어주신 내용을 참고해서 잘 들어보니 yo, man. i don't think that they heard you. won't you tell them what your name is. 처럼 들리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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