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Epik High) - 魂: Map The Soul 원고의 나열

변화는 창작자에게 정말 중요한 자극 중 하나다. 소극적으로는 생활 패턴을 바꾸는 것으로, 또는 작업 방식이나 환경을 교체하는 적극적인 시도를 통해서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데에 신선한 공기를 주입할 수 있으니 일련의 변화는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다음 작품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연이은 개발의 의지를 담보하게 해 주는 굳센 매개이며,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는 건강한 긴장인 것이다. 고인 물로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면 개편은 필수불가결하다.

2003년 데뷔해 총 다섯 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하며 힙합 신의 스타 그룹으로 완전히 입지를 굳힌 에픽 하이(Epik High) 역시 그러한 이유로 변화를 감행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기존 소속사에서 나와 자신들이 직접 레이블을 설립한 것. 회사의 매니지먼트에 맞춰 스케줄을 소화하고 현재의 음악 산업 시스템 안에서 음악 활동을 하는 게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고, 곡을 쓰고 앨범을 제작하는 데에도 적잖은 스트레스로 작용했을 테다. 이 상황을 벗어나 음악적 자유로움을 획득하고 활동에 쇄신을 기하려는 노력의 첫걸음이 새 둥지를 틀고 낸 <魂: Map The Soul>이다.

홈페이지를 제작해 거기에서만 유통하고 이전에는 거의 없던 책 형식을 띤 음반이라는 점이 새롭다. 멤버들의 일상, 고민과 더불어 작업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등이 기록되었으며 여행에서, 생활 속에서 찍은 사진들까지, 볼거리와 읽을거리가 많아 플라스틱 케이스 모양의 일반적인 앨범에서는 느끼기 드문 재미를 선사한다. 가수가 직접 판매를 하고 음반의 전통적인 외형 포맷을 확 바꾸었다는 점, 여기까지는 참신하다.

정작 중요한 음악은 이전 작품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흥미를 떨어뜨린다. 어두운 공간 어느 한 군데에 있는 듯한 특유의 우울함, 미국 본토의 하드 코어 힙합에 눌리지 않을 둔중함과 거친 문장, 약간의 장난기는 그동안 이미 충분히 보여줬다. 안타깝게도 이번 앨범에서 이전에 행한 양식들이 별반 차이 없이, 아무런 굴곡 없이 거듭되고 있어 다소 실망스럽다.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라든가 여타 방송 활동 때문에 음악에만 몰두할 수 없었던 회사의 관리 체계에서 나와 조금 더 트인 자리를 찾았다면 예전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생생한 음악이 나올 법한데 그러한 바람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타이틀곡 'Map The Soul'은 3, 4, 5집의 리드 곡으로 간택되어 온 고정된 형식과는 달라 약간의 특이함을 보이지만, 표현하려는 이미지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관념어만 풍부한 상황을 연출해 문장 간의 연결성을 떨어뜨린다. '거미줄'이나 'Let It Rain'처럼 비유와 표상을 튼튼하게 구성하면서도 하나의 문장을 명확하게 표현한 노래가 그립다. 늘 존재해 왔던 문제점 중 하나인 영어의 과용은 'Believe'에서도 심하게 반복되는데 멋진 메시지가 있음에도 단어와 단어를 사이에 두고 나타나는 영어로 말미암아 호흡이 끊겨 그 힘이 줄어든다. 훅(hook)이 아니었다면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큰 벽이 놓인 채 모든 걸 가로막는 격이 되었을 것이다.

래핑이나 가사, 반주의 매무새를 팽팽하게 가져가는 점은 다행히 유효하다. '선곡표'에서 노래 제목을 이어 센스를 과시했다면 'Scenario (피해망상 Pt. 2)'에서는 그 소재를 영화 제목으로 바꿔 또 한 번 재기를 드러낸다. 샘플링과 리듬의 말끔한 합일, 자신감으로 충만한 랩이 멋스럽게 들리는 'Top Gun', 마이크(MYK)와의 듀엣이 빛을 발하는 'Free Music'으로 형성하는 견고함은 새로운 게 보이지 않아 드는 아쉬움을 희석하는 역할을 한다.

2008년, 그룹의 리더 타블로는 5집 <Pieces, Part One> 발표 후 가진 인터뷰에서 “제가 하고 싶은 것과 해야 되는 것, 혹은 사람들이 저에게 원하는 것들의 괴리감이 계속 넓어지고 있어요”라며 당시 그가 느낀 어려움을 밝힌 적이 있다. 그것에 심신이 쇠약해지지 않기 위해서, 괴리감을 좁히고자 독립을 선택하고 변화를 모색하지 않았나 싶다. 음악팬이라면 누구나 아는 대중 스타이고 상업적 성공에도 가까운 인물들이지만, 고이기를 거부한 팀은 용단을 내렸다.

아무리 자신들 스스로 길을 개척하겠다는 위대한 결심을 했더라도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타블로, 투컷, 미쓰라 셋이서 직접 기획을 주도하고 누구의 간섭 없이 음악을 만드는 일을 이제 막 착수한 만큼 새롭게 시작할 시기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뜨고, 한편으로는 불안감에 걱정했을 것이 분명하다. 기쁨과 어느 정도의 마음 졸임 탓에 신선한 음악적 시도나 변화에는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게 또렷하다. 다음에는 워밍업이 아닌 제대로 된 본 운동을 보여 줄 차례다.

2009/04 한동윤 (www.izm.co.kr)


덧글

  • sesism 2009/04/06 11:36 #

    아, 나왔군요!! 뭔가 부족한 앨범인 듯하지만 어쨌든 저도 당장 구입해서 들어봐야겠어요 :>
  • Tag 2009/04/06 12:32 #

    일단은 힘을 실어줘야 할 따름이겠죠? 요즘 꽤나 바쁘게 움직이는 듯 보이더군요. :)
  • 클라 2009/04/06 16:03 #

    음악적으로 큰변화는 없지만 이러한 행보는 참 마음에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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