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 뮤지션이 자신들의 곡을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으로 재구성해서 앨범을 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런 전례가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거의 없어 생경하고 새롭다. 그러나 에픽 하이(Epik High)의 히트곡들은 3집 <Swan Songs>부터 이미 일렉트로니카의 숨결이 들어가 있었기에 이들의 음악이 본격적으로 전자 사운드를 입더라도 놀라울 만큼 신선한 변신이 되지는 못할 것으로 예상되는 게 사실이다. 강도의 증가, 러닝타임의 확장, 랩 비중의 감소 정도가 직관적으로 감지 가능한 변화일 듯하다.
영민한 이들은 거기에 안주하지 않는다. 이미 5집 'B-Side 02: One'을 통해서 이름을 공개한 바 있는 디제이 프리즈(DJ Friz), 필터(Philtre), 여성 멤버 디에이치 스타일(dh-style)로 구성된 전자 음악 유닛 플래닛 쉬버(Planet Shiver)와 함께 대표곡을 리믹스한 이 앨범은 클럽 친화적인 둔중한 소리로의 가공과 동시에 그룹의 특징 중 하나인 서정미를 한껏 발산하는 데에 중점을 둔다. 또한, 단순히 곡의 BPM을 올리는 일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전자 음악의 다양한 하위 장르를 풀이해서 들려주고 있기에 '리믹스'라는 단어가 내포한 의미 표출에 건설적인 모습을 보인다.
수록곡 중 이번 리믹스 작업의 방향을 잘 나타낸 노래가 네 번째 앨범 <Remapping The Human Soul>의 타이틀곡 'Fan'을 새롭게 편곡한 'Fanatic'이다. 발 빠르게 달리던 원곡의 약한 트랜스 비트는 속도감과 무게감을 장착한 드럼 앤 베이스로 옮겨졌다. 스트링은 거두고 그 자리를 필터가 프로그래밍한 거친 건반 연주가 대신해 노래를 전혀 다른 랩소디풍의 트랙으로 치장한다. 볼륨 풍성한 사운드이지만, 잘 들리는 멜로디로 루프를 구성해 클럽 댄스 음악의 임무와 오리지널이 지닌 귀여움을 한꺼번에 만족하는 'Love Love Loveless', 구조와 전개에 대해 치밀하게 탐구했음이 느껴지는 'You Are The One', 미니멀한 비트 위에 의도적으로 건조한 분위기를 형성해 고독한 감정을 극대화하는 '버려진 우산'도 신선함과 일렉트로니카 향기를 내세우는 데 공신이 되어 준다.
기존 소속사에서 나와 자신들만의 음악을 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레이블을 만든 직후 발표한 <魂: Map The Soul>은 아쉬움이 컸다. 콘셉트라든가 내용물의 윤곽이 전작들과 별반 차이를 보이지 못했기 때문. 이때까지 그룹이 현시해 온 전자 음악 성향을 구체화했으며 다른 음악가들이 시도하지 않은 독특한 구조를 취한 이번 리믹스 앨범으로 에픽 하이는 다시금 재기를 발휘한다. 더불어 트렌드에 영합해 일부분 전자음을 도입한 것이 아닌 일렉트로니카 장르의 문법을 온전히 재현했다는 점이 음반에 의미를 더한다. 재치와 완성도의 구현, 에픽 하이다운 모습이 이것이다.
2008/08 한동윤 (www.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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