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뮤지션에게 '선배 뮤지션 누구와 닮았다'라는 표현만큼 기분 좋은 수식도 없다. 자기는 그들보다 훨씬 능력 있다며 젠체하고 거들먹거리는 게 장기가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다. 뛰어난 선배들의 이름과 붙어 호명되는 일, 이것이야말로 가슴 설레고 뿌듯한 경우 아니겠는가. 그와 같은 수식으로 세간의 집중이 되는 뮤지션이 하나 등장했다.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 커먼(Common)의 고향으로 유명한 시카고 출신의 리듬 앤 블루스 가수 제레마이(Jeremih)가 바로 찬사의 주인공이다. 《올뮤직 가이드》의 앤디 켈먼(Andy Kellman)은 그의 첫 음반에 대해 “112의 슬림(Slim)과 젊은 라파엘 사딕(Raphael Saadiq) 사이 어딘가에 있는 제레마이의 매력적이고도 영민한 보컬은 호감이 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남겼을 정도. 제레마이의 동명의 데뷔작을 들으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제레미 펠튼(Jeremy Felton)이 본명인 그는 가족들 모두 음악을 좋아하고 가깝게 지냈던 덕분에 남들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음악과 친해질 수 있었다. 세 살 때부터 악기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독학으로 피아노를 비롯해 색소폰, 드럼 등을 연주했다. 모건 파크 고등학교에 진학한 제레마이는 그곳에서 재즈 밴드와 마칭 밴드에서 활약하며 예비 음악가로서 능력을 가꿔 나갔다. 16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리노이 주립대학교에 진학해서는 캠퍼스에서 개최하는 뽐내기 대회에 나가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노래를 불렀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공연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을 들었다. 이때부터 제레마이는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보컬리스트로서의 재능까지 주셨음을 인지하게 된다.
그는 다시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예술, 대중매체 전문 교육 기관인 시카고 컬럼비아 칼리지에 들어가서 향학열을 불태운다. 그곳에서 음반 프로듀서인 믹 슐츠(Mick Schultz)와 인연을 맺었고 그와 함께 'My Ride'라는 곡을 만든다. 이때가 아마 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음반 제작에 불씨를 당긴 시점이었을 듯하다. 제레마이는 배드 보이 레코드사(Bad Boy Records)의 남성 중창 그룹 데이트웬티식스(Day26)의 멤버이자 그의 사촌 윌리 테일러(Willie Taylor)로부터 보컬 지도를 받았다. 자질은 있었지만,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음을 자신도 잘 알았기에 그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그리고 2009년 2월, 제레마이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기회를 잡는다. 주류 팝 음악계를 이끄는 아일랜드 데프 잼 레이블(Island Def Jam Music Group)의 대표인 작곡가 겸 프로듀서 엘에이 리드(L. A. Reid)를 만난 그는 무사히 오디션을 치렀고 흑인 음악의 미다스를 흡족케 함으로써 당일 데프 잼과의 계약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뮤지션의 꿈이 서서히 가시화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3월 말, 대망의 데뷔 싱글 'Birthday Sex'가 라디오 전파를 타며 미국 전역으로 흘렀고 비슷한 시기에 빌보드 R&B/힙합 차트 93위에 진입함으로써 차세대 리듬 앤 블루스 스타의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는다. 흑인 음악 마니아들의 열렬한 성원으로 같은 차트에서 12주 동안 1위를 지키던 제이미 폭스(Jamie Foxx)의 'Blame It'을 제치고 새롭게 정상에 등극했으며 싱글 차트에서는 4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Birthday Sex'는 상업적으로만 히트한 것은 아니었다. 유명 언론의 호평도 줄을 이었다. 《뉴욕 매거진》의 에이모스 바샤드(Amos Barshad)는 이 노래를 가리켜 “여름을 대표하는 노래”라고 칭하는가 하면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존 카라마니카(Jon Caramanica)는 알 켈리(R. Kelly)의 노래와 비교하며 “패러디에 근접한 침소(寢所)의 테마곡, 환상적인 싱글”이라고 치켜세웠다. 오토튠으로 변화를 준 보컬은 특유의 유연함으로 청취자들에게 편하게 다가섰고 생일날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솔직하게 표현한 노랫말은 그와 비슷한, 혹은 동일한 일을 겪은 이들의 공감을 샀다. 내용면에서나 음악을 표현하는 형식에서나 젊은 세대들의 감성을 건드린 것이다.
앨범의 총 감독은 시카고 컬럼비아 칼리지에서 제레마이와 만나 음악적 동반자가 된 믹 슐츠가 맡았다. 이전까지 주류 흑인 음악 신에서의 활약이 거의 없었던 그이지만, 제레마이가 그를 믿고 모든 것을 일임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인 친분뿐만 아니라 프로듀싱 감각이 탁월했기 때문일 터, 어쩌면 우리에게 익숙한 유명 프로듀서가 아니기에 제레마이의 데뷔작은 색다르고 신선한 스타일을 접하는 자리가 될 듯하다.
믹 슐츠는 작금 메인스트림이 지향하는 편곡 양식을 그대로 따른다. 오토튠을 적절하게 활용해 부드러운 느낌을 살리며 때로는 미니멀한 비트 편성으로 화려함에서 올 어지러움을 미연에 방지한다. 'Jumpin'에서는 촙트 앤 스크루드(chopped and screwed) 기법을 사용해서 곡의 완급 조절에도 신경 쓰고 있으니 다양한 매력을 느껴봄직하다. 속도감 있는 비트 나열로 하우스 느낌을 내는 클럽튠 'Runaway', 느린 템포임에도 사이사이에 삽입된 추임새 보컬, 겹으로 쌓은 코러스로 인해 재미를 잃지 않는 두 번째 싱글 'Imma Star (Everywhere We Are)', 똑딱거리는 아기자기한 리듬과 너른 공간감을 형성하는 신스 사운드가 돋보이는 'Break Up To Make Up' 등은 꼭 현란한 장치가 아니더라도 귀를 끌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앨범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제레마이다. 그가 노래 부르는 것을 가만히 들으면 크리스 브라운(Chris Brown)과 니요(Ne-Yo)를 반반씩 섞어 놓은 듯한 느낌이다. 업 템포의 트랙에서 신나게 노닐 줄 알면서도 정적인 리듬 앤 블루스에서는 말랑말랑한 음성을 앞세워 감수성을 살며시 흔드는 보컬 연기를 펼친다. 믹 슐츠와의 첫 합작품 'My Ride'는 래핑과 싱잉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흥을 돋우고 앨범 마지막에 자리 잡은 'Birthday Sex'의 믹스 버전에서도 그러한 장기를 엿볼 수 있다.
그가 댄서블한 곡을 타이틀로 선정해 출현했기에 일부는 고만고만한 가수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Starting All Over'나 'My Sunshine'을 들으면 잠시 품었던 부정적인 판단을 내려놓을 것이다. 이 두 노래에서 앞서 언급했던 '감수성을 흔드는 보컬 연기'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1990년대 향취를 풍기는 리듬 앤 블루스 'Starting All Over'는 보컬의 힘을 최대한 뺀 채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My Sunshine'에서는 나른함과 곱상함이 물씬 묻어난다. 노래 부르는 이의 음성이 중심이 되는 R&B도 훌륭하게 소화하는 인물임을 확인 가능하다.
제레마이는 오는 9월 30일에 개최될 예정인 영국 최대의 흑인 음악 행사 《모보 시상식(MOBO Awards)》에서 '최우수 R&B/소울 뮤지션'에 후보로 오르며 실력을 인정받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인기가 얼마나 뜨거운지를 증명해 보이고 있다. 재능은 또한 수치로도 설명된다. 자국인 미국에서도 처녀작 <Jeremih>는 빌보드 R&B/힙합 앨범 차트 1위, 빌보드 앨범 차트 6위라는 어마어마한 성과를 달성했으니 더 이상의 부연은 불필요할 것 같다. 제레마이는 본 작품으로 다른 음악가들과의 비교를 넘어 리듬 앤 블루스 신에 자신만의 족적을 남길 채비를 단단히 갖추고 있다.
2009/09 한동윤
음반 해설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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