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발표한 데뷔 앨범 <I Am>의 'Best Of Me'와 2년 터울을 두고 공개한 두 번째 정규 음반 <Epiphany> 수록곡 'What You Do'로 크리셋 미셸(Chrisette Michele)의 음악은 우리나라 몇몇 사람들에게 친숙하다. 주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면 상대방이 받기 전까지 잔잔한 음성으로, 또는 애절한 목소리로 얼마 안 되는 시간을 응대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통화 연결이 되면 안부나 용건을 묻기보다 누구의 노래인지를 먼저 물을 수밖에 없을 만큼 그녀의 노래는 찰나에 여러 사람을 홀렸다.
마법은 빌보드 차트에서는 온전하게 발휘되지 못했다. 두 작품의 앨범 차트는 각각 29위와 1위로 선방과 완벽한 성공을 과시했으나 각각의 것에서 떨어져 나온 총 여덟 개의 노래 중 'If I Have My Way'만이 싱글 차트 100위권 안에 유일하게 진입해 무척이나 초라한 성적을 보유하게 됐다. 멋진 데뷔에 이어 가뿐하게 소포모어 징크스를 비껴간 그녀였음에도 주류에서 맘껏 놀기를 허락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크리셋 미셸이 한국에서나 좀 팔리는 '컬러링 가수'라고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기와 트렌드에 대한 고집, 지나친 상업성의 바로미터가 된 메인스트림에 배격 당할 뿐이지 전작에 이어 이번 앨범에서도 그윽하고 훌륭한 향을 내는 리듬 앤 블루스, 소울의 전령으로 입지를 다지는 중이다. 빨리 반응하게 하고 머릿속에 잠류했다가 사라져 버리는 유행의 첨병들과는 다른 깊이를 선사한다.
큰 틀에서는 눈에 띠는 변화가 없으나 <Epiphany>는 1집의 'Good Girl', 'Be OK', 'Let's Rock'에서 보여 줬던 것처럼 힙합과 펑키한 요소를 접목한 곡이 확 줄어든 것이 특징이다. 유사한 분위기는 'Mr. Right'가 유일하다. 대신 로드니 저킨스(Rodney Jerkins)가 특유의 업 비트 스타일이 아닌 적당한 강세로 멜로디와 리듬을 절충한 'Playin' Our Song'이나 비욘세(Beyonce)의 'Irreplaceable'이 겹쳐 연상되는 'Another One'처럼 미디엄 템포의 리듬 앤 블루스가 늘어났다.
요즘 널리 애청되는 리듬감 있는 형식 외에도 앨범에는 아름다운 선율의 곡, 크리셋 미셸의 뛰어난 기량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두루 구비되어 있다. 니요(Ne-Yo)와의 듀엣곡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은 'What You Do'가 정갈함을 매력으로 두었다면 두 번째로 싱글 커트된 'Blame It On Me'는 가라앉는 분위기에 걸쭉하게 내보내는 보컬로 웅장한 음의 연결을 연출한다. 뒤이어 흐르는 'All I Ever Think About'은 발성을 완전히 바꿔서 전과는 색다른 분위기를 주조한다. 건반 루프와 그 사이에 끼어드는 전자음이 빠르게 각인되는 'Epiphany (I'm Leaving)'는 셈과 여림을 오고가는 코러스가 노래의 풍미를 더한다.
이 음반이 수치로 나타내는 성과는 전작에 준한다. <I Am>과 마찬가지로 현재까지 40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고 싱글과 R&B/힙합 차트에서의 성적도 거의 비슷한 편이다. 좋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순위다. 2008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R&B 여성 보컬 퍼포먼스' 부문에 후보로 오르고 이듬해에는 '최우수 어반/얼터너티브 퍼포먼스' 부문을 수상했던 것과 달리 이번 그래미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으니 이 점은 덜한 부분이다.
앨범의 가치는 수치와 등급, 트로피의 유무로 셈하듯 매겨지지 않는다. 들을수록 누군가의 내밀한 이야기를 서서히 이끌어 내는 것 같은 설렘과 고요하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감동이 그것들을 충당하고도 남는다. 통화를 기다리던 몇 십 초 안에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은 'What You Do'도 있지만, 끝까지 들으면 이 가수가 누구인지 묻고 싶어지는 곡들이 즐비하다. 주류 R&B 신에서 흔히 마주할 수 없는 향 진한 소울이 고혹한다.
2010/02 한동윤 (www.izm.co.kr)
- 2010/02/26 15:30
- soulounge.egloos.com/286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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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발매 당시 향레코드에 사러 갔을 때 품절돼서 그냥 안 샀는데, 지금은 재고가 있어도 이상하게 꼭 사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흐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