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산, 환각, 리듬감의 조우, Cypress Hill - Black Sunday 원고의 나열

수많은 라틴계 미국인 래퍼가 그들만의 리그를 못 벗어났던 반면 라틴계 멤버로 구성된 힙합 트리오 사이프레스 힐(Cypress Hill)은 단숨에 주류 힙합 신에 입장했으며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컬럼비아 레코드사(Columbia Records)라는 대형 레이블과 계약해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것도 쾌속 순항에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룹의 대표 음악감독 디제이 머그즈(DJ Muggs)가 제조한 독창적이며 흡인력 있는 비트와 들으면 바로 그임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한 비 리얼(B-Real)의 비음 섞인 듯한 고음 랩, 센 도그(Sen Dog)의 남자답고 힘 있는 래핑은 서로 절묘한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사이프레스 힐만의 음악적 특징을 도드라지게 했다.

1988년 팀을 결성했을 때에는 디브이엑스(DVX)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센 도그의 친동생 멜로우 맨 에이스(Mellow Man Ace)도 함께인 4인조 체제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솔로로 활동하길 원한 그는 팀을 떠났고 남은 이들도 새롭게 출발하고 싶은 마음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하고 1991년 동명의 데뷔작을 발표한다. 세 명의 장기로 이룬 상승효과로 말미암아 음반은 짧은 시간 안에 힙합 마니아들의 귀를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평단의 호평도 이끌어 냈다. 'How I could just kill a man', 'Hand on the pump', 'Latin lingo' 등이 지역 라디오 방송과 대학 방송의 전파를 타며 이름을 알린 덕분에 이들은 손쉽게 메인스트림으로 향할 수 있었다.

1993년에 출시된 그룹의 두 번째 앨범 <Black Sunday>는 힙합 필드에서 그들의 입지를 한층 단단하게 다지게 해 준 작품이 되었다. 펑크(funk), 블루스. 올드 스쿨 힙합, 메탈, 재즈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채집한 음원 소스를 엮어 만든 반주는 어느 정도 넘실거리는 리듬감을 내비치는 동시에 몽환적이면서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펑키함이 특징이었던 전작과 달리 앨범을 관통하는 대기가 확 바뀌어 있었다. 'I wanna get high', 'I ain't goin' out like that', 'Insane in the brain'에서처럼 찢어질 듯 괴상하게 울리는 관악기 소리, 콘트라베이스를 이용해 구성한 탄성력 뛰어난 루프, 간간이 삽입한 의도적으로 뒤튼 기타는 강한 인상을 주며 거부할 수 없는 중독성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두 래퍼의 완전히 다른 랩 스타일 또한 앨범의 재미를 증가시킨 요소였다. 비 리얼만의 특별한 톤은 몇몇 곡이 지닌 음울한 상태를 상승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센 도그의 거친 랩은 한편에서 공격성을 띤 채 음악의 강도를 높이는 일을 보조했다. 평평하다거나 심심하다는 인상이 전혀 들 수 없을 정도로 둘의 음성은 확연히 대비돼서 랩을 듣는 데 흥미를 유발할 수 있었다.

<Black Sunday>의 또 다른 특징은 마리화나 예찬에 있다. 센 도그와 비 리얼은 어렸을 때부터 마리화나를 펴 왔으며, 특히 센 도그는 담배로 치자면 애연가일 만큼 마리화나에 대한 대단한 애착으로 유명하다. 앨범 부클릿에 '삼과 대마초는 같은 것이며 마리화나라는 단어는 멕시코인들이 대마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대마초는 기원전 4,000년 경 중국에서 처음으로 재배되었다.'라든가 '대마는 메스꺼움, 진통, 경련 등을 치료하는 의약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등의 대마초에 관한 사실과 긍정적인 점 열아홉 가지를 기재했을 정도다.

몇몇 곡이 몽롱한 분위기를 갖는 이유가 그런 환각 상태에 기반을 두며 이를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화나를 피우고 나서 몸이 풀리고 기분이 좋아진 상황을 노랫말로 옮긴 'I wanna get high'를 비롯해 마리화나를 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언급한 뒤 마리화나 파이프에 불을 붙이라고 권유하는 'Hits from the bong', 대마초 재배를 합법화하라고 주장하는 'Legalize it'가 그러하다. 이처럼 환각제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일각에서는 사이프레스 힐의 음악에 '도프 랩(dope rap)'이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했다.

이들이 즐긴 성공에 대한 환각은 안타깝게도 다음 작품부터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다. 디제이 머그즈의 비트는 여전히 강한 에너지를 품고 있었고 일부 매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스타일의 고수를 마뜩잖게 여긴 이도 존재했다. 미국 내에서만 3백만 장 이상이 팔린 <Black Sunday>와 달리 다음 앨범 <Cypress Hill III: Temples Of Boom>은 백만 장, 4집 <Cypress Hill IV>는 50만 장을 겨우 넘겼다. 3집은 빌보드 앨범 차트 10위 안에 들었으나 네 번째 앨범은 11위에 그쳤다. 1993년, 랩 그룹으로서는 최초로 데뷔 앨범과 소포모어 작품 두 장 모두를 동시에 앨범 차트 10위권 안에 진입시켰던 어마어마한 위업은 다시 이루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국내에서 이들의 이름이 회자되고 <Black Sunday>의 노래들이 대대적으로 언급된 일도 있었다. 1995년에 크게 히트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Come back home'은 사이프레스 힐의 음악을 본보기로 삼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분위기가 유사했으며 서태지는 이 노래에서 한국어로 비 리얼 모창을 하는 것처럼 비음을 흉내 내 표절 논란이 일었다. 이듬해에는 아이돌 그룹의 원조라 할 에이치오티(H.O.T.)의 1집 타이틀곡 '전사의 후예 (폭력시대)'가 'I ain't goin' out like that'과 흡사해 또 한 차례 표절 시비가 붙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랩 음악이 많이 출현하던 시기였음을 감안해보면 사이프레스 힐의 독특한 매력이 국내 음악가들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새천년에 선보인 <Skull & Bones>부터는 두 엠시의 랩을 록 반주에 풀어내며 파격적인 변신을 감행한다. 물론, 이전에도 공연이나 영화 <킬러 나이트(Judgment Night)>의 사운드트랙 등을 통해서 랩 록을 선사했으나 앨범에서 본격화된 적은 이것이 거의 처음이다. 비 리얼과 센 도그는 솔로 활동으로는 힙합을 하며, 프로젝트 팀을 결성해서는 랩 메탈을 하며 두 장르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고, 디제이 머그즈는 몇 편의 솔로 프로젝트를 통해서 비트 마에스트로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다. 그러나 세 멤버가 모두 모여 음산함, 환각적인 분위기, 리드미컬함을 한꺼번에, 근사하게 보여 준 자리는 여기가 아마도 마지막이 아닐까 하다. 데뷔 20년이 넘는 오랜 세월이 무색할 만큼 정력적으로 활동하지만 이를 재현하기란 쉽지 않은 일로 느껴진다.

2010/05 한동윤 (www.izm.co.kr)


덧글

  • Run192Km 2010/05/13 12:32 #

    전..사이프레스 힐 하면 떠오르는게 서태지랍니다...
    좋아서 그런건 아니고요 ㅎㅎ
  • 한솔로 2010/05/13 19:29 #

    그렇게 연상하시는 분들도 많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서태지 하면 사이프레스 힐이 떠오르지는 않더군요.
  • tag 2010/05/13 12:48 #

    이 앨범 때는 정말 엄청났었는데요. 정말 '헐~'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 한솔로 2010/05/13 19:30 #

    저도 마치 신세계를 경험한 것처럼 기분이 묘하면서 놀라웠어요. 벌써 십 수 년 전이네요...
  • 지구밖 2010/05/13 13:07 #

    한때 싸이프레스힐 좀 좋아했었는데 의외로 잘 안 듣고 있다가 거의 팔아버렸네요..
  • 한솔로 2010/05/13 19:31 #

    저는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음반은 다섯 장이나 있더군요. 갑자기 놀라웠습니다.
  • 로꼬 2010/05/13 15:12 #

    어렸을때 최고로 좋아하던 힙합그룹이었는데 반갑네요. Locotes란 곡을 젤 좋아했습니다.
  • 한솔로 2010/05/13 19:32 #

    블로그 주소와 닉네임에서 노래에 대한 사랑이 묻어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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