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과 생각들 2010-27 불특정 단상

01
밥을 맛있게 먹는 건 어떤 모습을 말하는 걸까? 텔레비전 생활 정보 프로그램에서 맛있게 음식 하는 집 소개할 때 인터뷰이가 되는 손님들처럼 호들갑떨면서 먹는 것? 아니면 숟가락과 젓가락을 바쁘게 이동하면서 입 안에 음식물이 사라지지 않도록 꾸역꾸역 집어넣는 것? 추석 당일 아침 식사를 할 때 작은어머니는 내가 밥 먹는 모습을 보며 '넌 참 밥을 맛없게 먹는다'라고 말씀하셨다. 표현에 인색해서인지, 집 외의 다른 데에서 밥 먹는 걸 부담스러워 해서인지, 원래 밥 먹는 거에 그렇게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인지 그 이유를 나도 잘 모르겠다. 밥맛이 없었다거나 반찬이나 국이 정말 맛이 없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닌데, 난 평상시에도 그렇게 먹는데...

02
식사를 마치고 배를 내오셨다. 먹으라고 권하셨지만 난 괜찮다고 했다. 그러자 작은어머니는 '요즘도 바나나만 좋아하니?'라고 물으셨다. 어렸을 때는 바나나가 가장 진귀한 과일이라고 생각했고 달아서 바나나를 좋아했다. 그런데 지금은 과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집에서도 어머니께서 그렇게 과일을 먹으라고 하시지만 그냥 못이겨서 먹는 것뿐이다. 난 왜 과일을 안 좋아하게 되었을까? 이상하게 나이 들수록 안 먹는 것들이 늘어난다.

03
할머니께서는 오랜만에 보는 반가움을 잔소리로 표현하신다. 아, 물론 그건 내 완벽한 착각일 수도 있다. 정말 내가 사는 게 한심하고 못 봐 주겠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지도... 잠도 안 깨고 머리도 무거운 아침부터 일, 생계, 결혼에 대한 3단 콤보 잔소리를 들으니까 역시 괜히 왔구나 싶었다. 집에서 출발하기 전에 아침 생활 정보 프로그램에서 본 추석 때 피해야 할 덕담을 한 시간 반 지나서 직접 들으니까 감격에 겨웠다. 예상은 당연히 되었으나 막상 경험하면 안 좋을 수밖에 없다. 난 정말 밝고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데 갑자기 비관적인 사람이 되어야 할 것만 같았다.

04
추석 선물을 살 게 있어서 백화점에 '백만 년 만에' 갔다. 유년 시절부터 백화점은 볼거리가 많고 즐거운 공간이 아니라 나에게는 공포의 집이나 다름없었다.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해서 그곳에 가면 땀이 났고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걸 견디고 가야만 했던 때는 그나마 아주 옛날에 백화점에 음반 매장이 있었을 때가 전부였던 듯하다. 요즘에도 음반 매장이 있는 백화점이 있을까? 모르겠다. 아무튼 와인 아니면 선식을 사려고 했고 내가 들어간 통로가 계단만 내려가면 선식 코너가 바로 보여서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물건을 고르기 시작했다. 점원 아주머니가 오셔서 '선물 하시게요? 이게 잘나가요'라고 말씀하시자마자 나는 '네, 그럼 그걸로 주세요'라고 말하며 물건을 받고는 황급히 계산하고 나갔다. 2분도 안 걸려서 나온 것이었다. 바깥에 나가자 자유와 해방의 신선한 바람이 나를 맞아 주고 있었다.

05
심심하고 쓸쓸하고 무기력하다. 가을 보딩이 시작되었나 보다.

덧글

  • Run192Km 2010/09/24 16:47 #

    전 설렁탕 같은거 후루룩 뚝딱 맛있게 먹는 사람들이 정말 맛있게 먹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던 자기만 만족스럽게 먹으면 되는거죠 뭐 ㅎ
  • 한솔로 2010/09/27 10:59 #

    저는 뜨거운 음식을 그렇게 흡입하듯이 먹는 게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극기 훈련하는 것도 아니고... 다들 자기가 만족하는 게 다르겠죠?
  • mikstipe 2010/09/24 17:18 # 삭제

    글로만 봐서는 솔로님께서 어떻게 식사 습관을 가지셨는지는 파악은 안되네요... 너무 차분하게 조용히 .. 작게 ,,, 드시는 걸까요? ^^;; 요새 서울 백화점에는 아마 음반매장 없을걸요? 인천 신세계 백화점은 지하 층에 신나라 레코드가 들어와 있기는 합니다만... 아, 영등포 신세계 쪽에는 핫트랙스가 있던가?
  • 한솔로 2010/09/27 11:01 #

    조용히 먹기는 해요. 반찬도 덜 먹고, 거의 밥에만 충실한 정도?
    음반 매장이 있는 백화점이 있긴 하군요. 놀라울 따름입니다. 장사는 되는지...
  • 로니우드 2010/09/24 22:04 #

    1. 전 어디가서 음식 복스럽게 먹는다는 소리도 듣지만, 걸신들린 듯 먹는다는 소리도 듣습니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깨작깨작 먹는건 안좋아하는 것 같아요.

    2.저도 이상하게 과일은 별로 안먹게 되네요. 있어도 안먹고 없으면 역시 못먹고요. 집안에서 과일 먹는건 누나밖에 없네요.

    4.저도 사람 많은 곳은 정말 싫어하는데, 백화점은 너무 좋아합니다. 뭔가 되게 기분 좋아요. 흐흐흐
  • 한솔로 2010/09/27 11:04 #

    어른들은 그렇게 파워풀하게 먹는 걸 좋아하신다죠? 배우자가 될 사람의 부모님께 잘 보여야 하는 걸 생각하면 그렇게 먹는 것도 고려해 봐야겠어요.
    과일 안 드시는 분이 또 계셨군요. 다행입니다.
    저도 그런 기분을 만끽할 날이 올까 모르겠습니다.
  • tag 2010/09/24 23:57 #

    01 입안 가득이 트렌드입니다.

    02 저는 지금도 과일귀신.

    04 크리스마스 이브 교보문고의 악몽이...

    05 동감입니다.
  • 한솔로 2010/09/27 11:06 #

    입안 가득 넣고 씹으면 소는 누가 키우죠?
    귀신이라고 할 만큼 저는 딱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는 것 같아요.
    그날 교보문고에 사람 터지나요? 그날에는 거기를 갈 일이 없어서요...
    함께해요. 가을 라이딩~
  • 뇌를씻어내자 2010/09/25 01:49 #

    전 혼자 살다보니 과일을 안 먹게 됐어요. 좋아하긴 하는데 잘 안 사게 되고, 막상 사놔도 썩어나자빠진 꼴을 보기 전까지 그게 냉장고에 들어있단 사실을 까먹게 돼요. 얘기하니까 먹고 싶네요.
  • 한솔로 2010/09/27 11:07 #

    집에 뭘 먹을 식구가 없으면 구입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 같아요. 먹는 것보다 버려지는 게 더 많아지고. 과일을 원하는 갯수 대로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 2010/09/25 22:39 # 삭제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솔로 2010/09/27 11:09 #

    응~ '잘'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이렇게 살아는 있지.
    학교는 다닐 만하고? 우리가 너무 일찍 가는 바람에 얼굴도 못 보고 추석을 지나쳤구나.
    할머니는 공부에 전념하는 걸 원하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닐까?
    언제 한번 보자꾸나~ 연락할게~
  • mizrahi 2010/09/28 04:57 # 삭제

    바나나 ㅎㅎㅎ
  • 한솔로 2010/10/03 17:11 #

    바나나가 그렇게 좋아요?
  • 2010/09/29 22:56 # 삭제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솔로 2010/10/03 17:12 #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동생 분도 저랑 같은 처지인가 봐요~ :)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