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흑인음악의 선명한 자취, 현진영 - 흐린 기억 속의 그대 원고의 나열

1992년 가요계를 뜨겁게 달군 스타는 서태지와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현진영은 경쾌한 음악, 독특한 안무와 패션을 앞세워 하반기 가장 뜨거운 인물로 등극했다. 그가 부른 2집 타이틀곡 '흐린 기억 속의 그대'는 서태지와 아이들에 이어 한 번 더 랩 음악 돌풍을 일으켰고 유행에 민감한 10대, 20대들은 그처럼 옷을 입었다. 국내에서 이제 막 젊은 대중의 호응을 사기 시작한 랩과 힙합 패션이 우리 대중문화계의 한복판으로 빠르게 들어선 것이다. 현진영을 통해 또다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스펠풍으로 약간은 엄숙한 분위기를 내는 도입부를 지나면 노래는 흑인음악에 기반을 둔 펑키한 댄스 팝으로 변모한다. 가스펠, 하우스와 업 비트 컨템퍼러리 R&B의 혼합, 랩 등 국내 음악팬들에게는 생소한 형식들이 결합된 판이지만 흥겨운 래핑은 많은 이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속에) 나의 모습 찾을 수가 없어 (없어)' 같은 콜 앤드 리스폰스(주고받기) 형식의 후렴이나 'Hit it!', 'Let's go!'처럼 노래 중간에 삽입된 보컬 샘플과 단순한 구호는 자연스럽게 듣는 이들의 제창을 꾀했다. 성대에 힘을 줘 발성을 조이는 창법도 특별했다. 이 덕분에 현진영의 노래를 접한 사람들은 그 어떤 인위적인 설득 없이 랩과 흑인음악을 쉽고 편하게 받아들이게 됐다.

인상적인 춤도 노래와 함께 다수의 추종을 받았다. 현진영은 외국의 래퍼들이 랩을 할 때 리듬을 타면서 팔을 양옆, 위아래로 흔들거리는 동작에 착안해 안무를 만들었다. 래퍼들의 그런 제스처와 달리 현진영의 춤은 어느 정도 박력이 있었으나 간결한 편이어서 한 번만 봐도 누구나 대강은 따라 할 수 있었다. 일명 '엉거주춤 춤'이라 불린 안무는 이내 화제가 됐고 이것 역시 많은 사람의 동참을 이끌어 냈다. 학교 교실에서, 길거리에서, 록카페에서 현진영의 춤을 따라 하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몇 년 뒤에 나온 민중가요 노래패 꽃다지의 '바위처럼' 율동에도 이 안무가 쓰였다는 점은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가늠하게 해 준다.

독특한 패션도 현진영 열풍에 일조했다. 그는 총천연색에 큰 사이즈의 후드 티셔츠와 배기팬츠를 착용해 다른 가수들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또한 힙합 듀오 크리스 크로스를 벤치마킹해 옷을 뒤집어 입는 파격적인 모습으로 더 주목받기도 했다. 바지를 내려 입고 티셔츠에 달린 모자를 쓴 것은 춤으로도 나타낸 엉거주춤한 느낌을 강조하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이는 당시 미국 래퍼들, 또는 빈민가 흑인들이 주로 입던 복장이었다. 현진영을 통해 통이 넓은 바지와 후드 티셔츠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으니 '흐린 기억 속의 그대'는 힙합 패션의 확산에도 중대한 계기가 된 셈이다.

1989년 '야한 여자'로 데뷔한 현진영은 이듬해 '슬픈 마네킹'으로 주목받았지만 많은 이의 기억에 자리 잡지는 못했다. 그때도 랩과 화려한 동작을 선보이긴 했으나 음악과 춤에 마니아 색채가 짙었다. 대신 '흐린 기억 속의 그대'는 즐기기에 쉬운 음악, 대중적인 안무와 눈에 띄는 패션이 맞아떨어지며 세인의 이목을 거뜬하게 획득할 수 있었다. 1집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성공이 따라왔다.

노래의 히트는 개인의 성과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후 랩 음악이 유행하는 데에 물꼬가 됐고 그때까지만 해도 익숙지 않은 힙합 문화를 전파하는 다리 역할을 했다. 더불어 힙합 댄스의 발전, 대중음악에서 안무에 개성을 부여하는 움직임의 확산을 도모했다. '흐린 기억 속의 그대'는 제목과는 달리 국내에서만큼은 흑인음악의 선명한 자취를 남겼다.

2014/02 한동윤
엠넷 레전드 송 100

덧글

  • 작두도령 2014/04/25 11:50 #

    어렸을적에 저도 따라하면서 자랐고, 지금도 가끔씩 노래방에서 부르곤 하네요!!
    두근두근 쿵쿵까지만 해도 그렇게 사라질 줄은 몰랐었는데 말이죠...
    (우스갯 소리로 지금의 sm이 소속 연예인들 인성 관리에 그렇게 신경 쓰는 것도...)
    그래도 2006년에 재즈힙합 컨셉의 타이틀곡 소리쳐봐(Break Me Down) 였나요?
    그 곡으로 여전히 음악적으로 건재함과 흑인 음악의 색채를 자랑하셨던 것 같네요.
  • 한동윤 2014/04/25 17:58 #

    재즈 힙합 앨범 낸 게 벌써 그렇게나 오래됐군요~ 거의 10년이... 세월 진짜 빠르네요.
    새 음반 계획은 아직도 없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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