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일오비 '아주 오래된 연인들' / 90년대 연애 스케치 원고의 나열


연인들에게 권태기는 언젠가는 맞닥뜨리게 되는 복병과도 같다. 특히 사귄 기간이 오래된 짝일수록 잠재해 있던 관계의 싫증과 나른함은 조금씩 각자의 영혼 없는 행동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 심드렁함이란 그럭저럭 인연을 유지해 주긴 해도 연애 초반의 열렬함을 회복해 주진 못한다. 연인 사이에 무신경한 상태가 계속되면 그들은 결국 이별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공일오비의 세 번째 앨범 [The Third Wave]에 수록된 '아주 오래된 연인들'은 권태기에 접어든 연인들의 속마음과 메마른 생활을 적확하게 묘사한다.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 “주말이 되면 습관적으로 약속을 하고 서로를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을 하지” 등의 가사는 애정이 식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오래된 커플의 일상성을 표현한다. 무척 단순하지만 감정이 무뎌질 대로 무뎌진 연인의 심리를 꿰뚫은 문장은 신세대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몰래 다른 사람을 만나고 헤어짐을 준비하는 단계도 추가함으로써 흥미로움은 배가된다.

노래는 단지 아슬아슬한 국면만을 그리지는 않는다. “처음에 만난 그 느낌 그 설렘을 찾는다면 우리가 느낀 싫증은 이젠 없는 거야”라며 명료한 해결책도 제시한다. 초심으로 돌아가기를 조언하는 후렴은 안타까운 이야기를 긍정성이 깃든 청춘들의 트렌디한 사랑 노래로 뒤바꿔 놓는다. 노래가 나온 지 20년이 넘었음에도 당시와 비교해 세월의 격차가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연인들의 일반적인 정서와 진리에 가까운 위기 극복 해법을 고루 담은 가사 덕분이다.

감각적이고 치밀한 편곡 역시 노래가 강한 생명력을 과시하는 데 일조했다. '아주 오래된 연인들'은 1990년대 초반 미국, 영국 주류 음악계에서 점차 인기를 얻던 하우스를 발 빠르게 도입함으로써 제목과는 정반대로 아주 신선한 스타일을 선보였다. 각종 효과음을 비롯한 샘플링 위주의 구성은 아직 국내에서는 세력을 얻지 못했던 힙합과 일렉트로닉 댄스음악의 묘미를 전달했다. 반주로도 유행에 민감한 젊은 청취자들과 소통한 것이다. 또한 후렴에 아카펠라 방식의 코러스를 입혀 노래의 채도를 높이는 동시에 아기자기함을 확보했다. 이는 마니아 장르를 기반에 둔 반주가 은근히 내비칠 생소함을 상쇄해 주는 대중 맞춤형 경량화 기법이었다.

곡은 참신한 짜임새로도 기존의 가요와 차별화했다. 1분 20초에 달하는 긴 전주는 그야말로 파격적이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그 어떤 뮤지션도 36마디나 되는 전주를 노래에 들인 적이 없었으며 정통 하우스 음악 중에도 이처럼 상당한 길이의 전주를 지닌 곡은 찾기 어려웠다. 동일한 마디의 반복이지만 피아노를 바탕으로 퍼커션, 탬버린, 베이스 드럼, 해먼드 오르간 등 다양한 악기들이 차례로 추가돼 소소한 재미를 준다. 끝 부분 간주에서 피아노, 베이스, 기타를 호명하며 전주와 같이 연주를 덧씌우는 연출 또한 이채로운 방식의 브리지였다.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편곡의 색다른 멋을 성공적으로 구현했다.

'아주 오래된 연인들'은 다수의 청춘 남녀가 생각하거나 경험했을 법한 고민을 건드리며 보편성을 획득했다. 꿈같고 막연히 환상적인 사랑이 아닌 현실에서의 사랑을 노래해 수월하게 동감을 구할 수 있었다. 일상의 언어를 산뜻하게 구사하는 작사 능력이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젊은 연인을 주인공으로 한 가사에 맞춰 최신 경향의 음악을 토대로 신선미 넘치는 편곡을 선보인 것도 노래의 견고성을 올리는 데 공헌했다. 일련의 장점들로 노래는 세월이 지나도 많은 이로부터 사랑받는 트렌디하면서도 스테디한 연애 스케치로 등극했다.

2013/12 한동윤
엠넷 레전드송 100

덧글

  •  sG  2014/05/20 07:25 #

    전주가 길긴 하다고 느끼긴 했는데. 1분 20초라니 진짜 어마 길게 찍긴 했네요.
    역시 공일오비 정도의 깡이나 되니까 그때 그 정도로 정신 나간 구성으로 만들었지 싶기도 하고 ㅎㅎ;
  • 한동윤 2014/05/20 20:51 #

    전주만 봐서는 결코 라디오 프렌들리한 노래가 아닌데 방송에도 줄기차게 나왔으니 대성공이었죠~ 의외였어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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