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션 신해철이 지난 10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팬들 사이에서 '마왕'이라 불린 그는 일반 대중에게는 방송을 멋대로 진행하는 괴팍한 디제이, 자신의 생각을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독설가, 사회 현안과 정치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논객으로도 친숙하다.
표독스러움이 강해 비난도 많이 샀지만 음악만큼은 늘 크나큰 공감과 존중을 얻었다. 1988년 MBC 대학가요제를 통해 혜성처럼 등장한 뒤 솔로와 그룹을 거치면서 신해철은 매번 근사한 작품으로 감동을 선사했다. 특이한 행보 때문에 따라붙는 별칭들보다 뮤지션으로 각인돼야 할 이유는 찬란한 예술성을 간직한 디스코그래피가 말해 준다.

신해철과 동년배, 또는 1980~19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음악팬들에게 그가 쓴 가사는 무척 각별할 것이다. 누군가를 연모하는 이에게는 가슴을 울리는 서정시였으며,('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불투명한 앞날과 사회의 잣대를 두려워하는 청춘들에게는 차분한 위로가 됐다.('나에게 쓰는 편지') 속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현대 산업사회의 씁쓸한 이면을 스케치했고,('도시인')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세상의 매서움을 이야기하기도 했다.('Money')
그의 노래들은 대중의 보편적 감수성을 어루만지는 동시에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체경 역할을 톡톡히 했다. 또한 이런저런 쟁점과 워낙 일상적이어서 간과하기 쉬운 부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했다. 또래 젊은이들과 고민을 나누며 지성의 성장을 도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로는 현학적이라는 지적도 받았다. 넥스트의 두 번째 앨범 [더 리턴 오브 넥스트 파트 원: 더 비잉](The Return Of N.EX.T Part 1: The Being)에서는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졌고, 시리즈로 기획한 다음 앨범에서는 '혼란스러운 세계'를 화두로 꺼내며 얼마간 철학적인 태도를 취했다. 다소 무거운 주제로 말미암아 어렵다는 반응도 많았지만 사람으로서 갖는 기본적인 고민과 숙려를 대중음악으로 끌어낸 사실만으로도 새로웠고 대단했다. 신해철을 통해 대중은 비상한 진지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
곡도 단단함을 띠면서 다채로웠으며 항상 참신했다. 재즈('재즈 카페'), 프로그레시브 록('The Destruction Of The Shell: 껍질의 파괴'), 전자음악과 국악, 록의 퓨전('Komerican Blues'), 록 오페라('Lazenca, Save Us') 등 대중음악의 다양한 장르를 훌륭하게 구현했다.
크롬이라는 예명을 사용한 솔로 음반에서는 테크노를, 외국 프로듀서와 팀을 이룬 모노크롬 앨범에서는 전자음악과 록의 혼융을 시도했다. 그의 노정에 대중음악의 굵직한 국면들이 서려 있다. 작곡가, 프로듀서, 음향 감독으로서 신해철은 매번 열정적인 실험과 탐구를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각 장르가 태생적으로 지니는 정신과 태도를 동반하는 작업에도 충실했다.
신해철의 음악에는 사색과 폭넓은 세계관, 성실한 연구, 예술적 테크닉이 녹아들어 있었다. 언뜻 풍요로운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빈약한 가요계에 그의 창작은 건강한 활기를 불어넣었다. 자신의 작품활동을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부단히 담금질하는 몇 안 되는 진짜 예술가였다. 그런 위대한 아티스트가 우리 곁을 떠났다. 한국 대중음악의 큰 별이 졌다.
(한동윤)
2014.11.11ㅣ주간경향 1100호
주간경향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1411041409291&pt=nv
네이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3&aid=0000028504
표독스러움이 강해 비난도 많이 샀지만 음악만큼은 늘 크나큰 공감과 존중을 얻었다. 1988년 MBC 대학가요제를 통해 혜성처럼 등장한 뒤 솔로와 그룹을 거치면서 신해철은 매번 근사한 작품으로 감동을 선사했다. 특이한 행보 때문에 따라붙는 별칭들보다 뮤지션으로 각인돼야 할 이유는 찬란한 예술성을 간직한 디스코그래피가 말해 준다.

10월 27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신해철의 영정 사진 | 김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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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과 동년배, 또는 1980~19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음악팬들에게 그가 쓴 가사는 무척 각별할 것이다. 누군가를 연모하는 이에게는 가슴을 울리는 서정시였으며,('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불투명한 앞날과 사회의 잣대를 두려워하는 청춘들에게는 차분한 위로가 됐다.('나에게 쓰는 편지') 속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현대 산업사회의 씁쓸한 이면을 스케치했고,('도시인')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세상의 매서움을 이야기하기도 했다.('Money')
그의 노래들은 대중의 보편적 감수성을 어루만지는 동시에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체경 역할을 톡톡히 했다. 또한 이런저런 쟁점과 워낙 일상적이어서 간과하기 쉬운 부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했다. 또래 젊은이들과 고민을 나누며 지성의 성장을 도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전 활동 당시 무대에서의 모습 | 김영민 기자
때로는 현학적이라는 지적도 받았다. 넥스트의 두 번째 앨범 [더 리턴 오브 넥스트 파트 원: 더 비잉](The Return Of N.EX.T Part 1: The Being)에서는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졌고, 시리즈로 기획한 다음 앨범에서는 '혼란스러운 세계'를 화두로 꺼내며 얼마간 철학적인 태도를 취했다. 다소 무거운 주제로 말미암아 어렵다는 반응도 많았지만 사람으로서 갖는 기본적인 고민과 숙려를 대중음악으로 끌어낸 사실만으로도 새로웠고 대단했다. 신해철을 통해 대중은 비상한 진지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
곡도 단단함을 띠면서 다채로웠으며 항상 참신했다. 재즈('재즈 카페'), 프로그레시브 록('The Destruction Of The Shell: 껍질의 파괴'), 전자음악과 국악, 록의 퓨전('Komerican Blues'), 록 오페라('Lazenca, Save Us') 등 대중음악의 다양한 장르를 훌륭하게 구현했다.
크롬이라는 예명을 사용한 솔로 음반에서는 테크노를, 외국 프로듀서와 팀을 이룬 모노크롬 앨범에서는 전자음악과 록의 혼융을 시도했다. 그의 노정에 대중음악의 굵직한 국면들이 서려 있다. 작곡가, 프로듀서, 음향 감독으로서 신해철은 매번 열정적인 실험과 탐구를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각 장르가 태생적으로 지니는 정신과 태도를 동반하는 작업에도 충실했다.
신해철의 음악에는 사색과 폭넓은 세계관, 성실한 연구, 예술적 테크닉이 녹아들어 있었다. 언뜻 풍요로운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빈약한 가요계에 그의 창작은 건강한 활기를 불어넣었다. 자신의 작품활동을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부단히 담금질하는 몇 안 되는 진짜 예술가였다. 그런 위대한 아티스트가 우리 곁을 떠났다. 한국 대중음악의 큰 별이 졌다.
(한동윤)
2014.11.11ㅣ주간경향 1100호
주간경향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1411041409291&pt=nv
네이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3&aid=0000028504
덧글
차라리 본인이 평생 몰두했던 녹음엔지니어링에 매진해서 외국에서 활동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이제는 부질없는 일이 되었네요. 좋아도 했고 미워도 했던 사람이라 아직도 복잡한 심정입니다.
않지만 현실을 봐야한다. 그는 이미 떠났다.
그래도 행복했을거다. 그렇게 믿어야한다.
장례식장 가기전까진 그냥 안타깝고 좀 슬픈 정도였는데, 다녀온뒤로는 오히려 더 가슴이 요동치네요.
텍스트만 읽으며 속에서 흘렸던 눈물을 영정사진 앞에서 흘리고 나오니 감정이 더 솔직해지고 있나봅니다.
더 슬프고 싱숭생숭하셨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