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반 백스핀 1994년 (2) 원고의 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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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경 [이유같지 않은 이유]
1985년 "강변가요제"에서 '민들레 홀씨 되어'로 장려상을 수상하며 업계의 주목을 받은 박미경은 몇 년 뒤 데뷔 앨범 [사랑이 그런 것처럼]을 발표했지만 큰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쓰라린 실패를 경험했다. 그러나 신승훈, 김건모, 노이즈 등의 연이은 히트로 미다스의 손이 된 프로듀서 김창환의 도움으로 그녀는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하우스 음악('이유같지 않은 이유'), 레게풍의 발라드('이별 연습'), 재지(Jazzy)한 뉴 잭 스윙('서툰 기대') 등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댄스음악, 흑인음악을 구비해 친밀감을 형성했다. 김창환과 천성일, 김형석의 완성도 높은 프로듀싱 외에 박미경의 뛰어난 가창력도 자신의 성공을 도왔다. 귀여운 표정을 짓거나 뇌쇄적 눈빛을 보내면서 입만 벙끗거리는 여자 댄스 가수의 전형을 깨고 정말 노래를 잘하는 댄스 가수가 나온 것이다.



이승철 [The Secret Of Color]
개인 작품은 물론 드라마 사운드트랙의 인기로 발라드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지만 이승철이 예전부터 내내 그런 음악만 고집했던 것은 아니다. 솔로 데뷔 후 작곡가 하광훈, 김홍순 등과의 작업으로 말끔한 팝을 꾸준히 시도하던 그는 4집 [The Secret Of Color]에서 다시 한 번 음악적 세련미를 완성했다. Kenny G의 몇몇 노래들을 떠올리게 하는 '색깔속의 비밀', Manhattan Transfer풍의 아카펠라 코러스가 돋보이는 '겨울그림' 등 재즈 퓨전을 구사함으로써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또한 블루스 록('웃는 듯 울어버린 나'), 댄스 팝('착각', 독신일기'')도 갖춰 도회적 정서를 뽐냈다. 재즈 퓨전을 모색한 것 외에 Dire Straits, Sting 등 최고의 아티스트들과 작업한 유명 엔지니어 Neil Dorfsman의 참여도 음악에 깔끔함을 보조했다.



여행스케치 [다 큰 애들 이야기]
화려한 퍼포먼스를 앞세운 댄스 가수가 홍수를 이루고 젊은 감각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노래들이 나날이 늘어나던 때였지만 거기에 흡수되지 않는 이들에 의해 시장은 어느 정도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여행스케치와 그들의 네 번째 앨범 [다 큰 애들 이야기]가 그런 역할을 했다. 합창 중심의 어법과 소소한 인생사들을 엮은 가사는 순수한 아마추어리즘을 느끼게 하며 자극성 강한 주류의 대중음악과는 구분되는 매력을 제시했다. 이를 통해 여행스케치는 성부가 다른 가수들이 이루는 화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다룬 이야기가 얼마나 깊은 공감을 살 수 있는지를 수수하게 주장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도 반가울 순박함이 묻어난다.




크래쉬 [Endless Supply Of Pain]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에 객원 보컬로 참여한 덕분에 안흥찬이 이끄는 크래쉬의 인지도는 꽤 높아졌다. 하지만 압도적 다수의 대중이 전통적인 선율과 고운 음성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기에 크래쉬의 음반은 많이 팔리지 못했다. 난무하는 굉음과 짐승의 포효 같은 안흥찬의 보컬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듣기 거북할 요소였을지 몰라도 헤비메탈, 스래시 메탈 팬들에게는 복음이었다. 격렬함을 잃지 않는 연주, 격분에 찬 보컬은 속도감과 공격성, 폭발성, 음산함을 쟁취하며 크래쉬를 한국 헤비메탈의 계보에 길이 남을 아티스트로 만들었다. 스래시 메탈이 전 세계적으로 쇠락하던 시기라서 상대적으로 더 돋보이기도 했다.



전람회 [Exhibition]
영화 "건축학개론"을 통해 다시 널리 회자됐지만, 전람회는 데뷔 때부터 범상치 않은 음악성으로 당시 음악팬들에게 막대한 지지를 얻었다. 클래식 화성에 기반을 둔 전통의 발라드 틀로 다수의 호응을 구했으며, 여기에 고급스러움을 보강하는 재즈와 어덜트 컨템퍼러리 요소, 인스턴트적인 사랑이나 유희보다는 또래 청춘의 보편적 상념과 어깨동무하는 가사로 자신들을 차별화했다. 긴 호흡을 가져가면서도 잘 들리는 선율과 기막힌 완급, 서정미를 보이는 '기억의 습작'은 이들 듀오의 장기를 압축한다. 여기에 저음에서 특히 빛나지만 고음에서 너른 포용력을 터뜨리는 김동률의 보컬은 전람회의 음악을 더욱 매력적으로 전달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