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고 안타까운 이별도 연이었던 해였다. 가끔씩 냉랭함이 감돌기도 했지만 1990년대 스타 뮤지션들의 컴백과 멋진 작품들로 부담스러운 기운은 어느 정도 가시지 않았나 싶다. 에픽 하이는 준수한 신작으로 그들이 주류를 대표하는 힙합 그룹임을 다시금 선전했으며, god는 과거를 재현한 음악으로 "국민 아이돌"이라는 칭호가 아직도 유효함을 역설했다. 인디 신에서는 스탠더드 팝과 과거의 R&B를 멋진 하모니로 표현한 바버렛츠, 국악과 대중음악을 독자적인 스타일로 혼합해 보인 타니모션, 거칠고 야릇한 록 음악을 선사하는 아시안 체어샷의 앨범이 돋보였다. 이 밖에도 훌륭한 앨범들이 많았다. 2014년을 결산하는 의미에서 이번 한동윤의 다중음격에서는 "올해의 가요 앨범"을 선정했다.
에픽 하이 [신발장]
전작 [99]의 엉성함은 잊어도 된다. 아니, 엉성함이라기보다 새로운 둥지에 애써 적응하느라 발생한 과도기적 혼란이라고 해 두자. 어쨌든 이번에는 특유의 발랄한 재기와 서정성, 곡과 어투의 세기를 정상적으로 되찾았다. 타블로와 투컷이 주도해 제작한 비트는 힙합의 여러 장르를 섭렵하면서 에픽 하이의 전통이 된 부드러운 양식까지 커버해 흡족한 다양성을 나타낸다. 또한 이성 간의 사랑('헤픈엔딩'), 청년의 공상('RICH'), 불만스러운 사안이나 인물을 향한 공격적인 태도('BORN HATER') 등을 편안하고 재치 있게 풀어내 가사로도 즐거움을 준다. 객원 뮤지션의 인지도와 장기를 두루 감안한 영리한 게스트 섭외도 앨범의 견고함을 성공적으로 뒷받침했다. 에픽 하이스럽고, 에픽 하이다운 괜찮은 음악을 들려줬다. 지난번의 미숙함을 잊게 하는 컴백이다.
god [Chapter 8]
근 10년 만에 이뤄진 복귀이지만 노래들은 그 옛날 전성기와 똑같다. '미운 오리새끼'에서는 '보통날'이나 '길'의 냄새가 나고, '하늘색 약속'은 중간 템포의 적당한 경쾌함, 가스펠풍 편곡으로 2000년에 나온 '촛불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Saturday Night'는 'Friday Night'의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 온 가운데 '니가 있어야 할 곳'의 영어 랩 가사를 되풀이해 다시금 옛 기억을 되돌린다. 박진영과 함께했던 때의 음악을 그럴싸하게 복원했다. 하지만 대선배가 되고, 누군가는 아이 아빠가 된 것 등 과거와는 달라진 상황을 이야기해 자연스럽게 변화를 감지하게 해 준다. 이 점은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됐거나 가정을 이룬 팬들과 세월의 흐름을 공유하는 괜찮은 매개다. 때문에 [Chapter 8]는 가수와 팬들이 함께 즐기는 동창회처럼 느껴진다. 음악과 세월, 추억을 나누는 자리라서 더 즐겁다.
바버렛츠 [바버렛츠 소곡집 #1]
1950, 60년대에 활동했던 걸 그룹들이 떠올려지는 이름처럼 바버렛츠는 그 시절에 유행한 스타일을 행한다. 우리 대중음악 시장에서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던 색다르고 멋스러운 복고다. 로큰롤과 스윙이 합쳐진 '쿠커리츄', Phil Spector 스타일의 녹음 방식을 은은한 트로트로 표현한 이난영 커버곡 '봄맞이', Dusty Springfield, Billie Holiday, The Platters 같은 뮤지션들이 한꺼번에 연상되는 팝, 두왑, R&B의 퓨전 'Mrs. Lonely' 등 야릇하고도 구수한 시간여행이 펼쳐진다. 여기에 김은혜, 박소희, 안신애 세 멤버의 예쁘장한 하모니가 운치를 더한다. 모든 수록곡이 안정적인 화음 덕분에 곱게 들린다. 멤버 전원이 풀가동되는 보컬을 쉽게 만날 수 없는 요즘이기에 기쁨이 더욱 커진다. 지난날의 음악이 그리웠던 이들에게, 화음이 주는 감동을 동경하던 이들에게 [바버렛츠 소곡집 #1]은 잊지 못할 만남이 될 것이다.
국카스텐 [Frame]
지상파 방송 출연을 통해 많은 이에게 알려졌고, 이에 따라 주류가 불러 주는 밴드가 됐음에도 음악은 초심을 잃지 않았다. 높아진 인지도만 믿고 안일한 모습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단단함과 변화를 동반한 터라 오랜만에 내는 정규 앨범을 더욱 반갑게 맞이하게 된다. 강한 화력을 과시하는 하현우의 보컬, 하드록과 사이키델릭, 프로그레시브 성향이 공재하는 거세고 몽롱한 연주,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연신 들춰내는 관념적인 노랫말 등이 유기적으로 뒤섞여 기이한 매력을 생성한다. 이번에는 전자음을 많이 들여 한층 풍성하면서도 날카로운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으며, '뱀', '푸에고', '감염' 등 댄서블한 곡을 곳곳에 배치해 묵직한 흥겨움도 갖췄다.
신해철 [REBOOT MYSELF Part.1]
팬들이 고대한 모습은 아닐지 모르지만 신해철은 허무하게도 마지막 앨범이 된 7년 만의 솔로 복귀작에서 싱어송라이터, 엔지니어, 프로듀서로서 재능 충만한 모습을 어김없이 보여 줬다. 'A.D.D.A'에서의 원 맨 아카펠라는 곡 전체를 조망하는 안목, 리듬과 화음을 매끄럽게 표현해 내는 보컬 능력, 남다른 정성이 수반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를 온전하게 수행하면서도 날카로운 노랫말로 한국 사회의 씁쓸한 면을 꼬집는 특유의 어법도 동반했다. 세상에 해를 입히는 악한 존재를 바퀴벌레에 비유한 펑크(Funk) 록 스타일의 해충 박멸가(歌) 'Catch Me If You Can (바퀴벌레)', 신스 펑크와 포스트 디스코를 오가는 스타일로 예스런 흥취를 전하는 'Princess Maker'는 신해철이 빼어난 표현력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식에 대한 열정까지 겸비한 뮤지션이자 음악감독임을 재차 서술한다. 귀한 선물을 남겨 줘서 감사하다.
타니모션 [TAN+EMOTION (타니모션)]
우리 전통음악과 서구 대중음악을 적절하게 융합하는 작업은 녹록지 않다. 전자에 중점을 두면 낯설어지고 후자에 무게를 두면 평범한 작품이 나오기 십상이다. 퓨전 국악 밴드 타니모션은 그 딜레마를 극복하고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꽤 재미있는 음악을 선보인다. 이 결과는 약삭빠른 타협으로 내온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문법을 창출하겠다는 포부, 관습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국악의 요소를 폭넓게 갖추는 중에 프로그레시브 록의 구성으로 복잡성을 띠는가 하면('내려온다'), 인디 팝과 결합해 상큼함을 표하기도 하고('안 할 거면서'), 재즈와 어울려 그윽함을 내기도 한다('정'). 여러 장르와의 접목, 국악기와 양악기의 차진 어울림 덕분에 제3세계 음악을 듣는 듯한 이국적인 느낌도 난다. 주변의 시선을 재지 않은 올곧은 지향이 만들어 낸 멋진 결과물이다.
아시안 체어샷 [Horizon]
이 앨범에서 그나마 수월하게 감상할 수 있는 노래는 '밤비' 하나에 불과하다. 나머지 노래들은 거칠고, 어지럽고, 야릇하다. 하지만 이것이 아시안 체어샷이 뿜어내는 힘이며 매력이다. 우악스러운 기타 리프로 몰아치는 중에 템포를 바꿔 가며 긴장감을 조성하는 '해야', 사이키델릭과 프로그레시브 록의 절충을 보이는 '날 좀 보소', 나른하고 잔잔한 연주를 펼치다가 중반부부터 소리의 체구를 키우고 전자음까지 삽입해 혼란스러움을 더하는 '자장가' 등 괄괄함과 흉흉함은 앨범 전반을 차지한다. 부담스러울 수 있는 음악이지만 타이트한 연주, 노래의 분위기와 밀착하는 음산한 보컬, 기승전결이 명확한 구성 때문에 흥미롭게 다가온다. 여기에 한국적인 정서를 내는 가사와 노래 제목이 은연중에 친근감을 형성하고 있다.
Crush [Crush On You]
다양한 스타일을 모색한 것이 이 앨범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이다. UK 거라지풍의 비트로 흥겨움을 내는 'A Little Bit', 뉴 잭 스윙 리듬이 1990년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Hey Baby', 토크박스 연주로 말미암아 질박함이 크게 배어나는 펑크(Funk) 넘버 '밥맛이야', 현악기 반주가 1970년대 R&B를 연상시키는 'Whatever You Do' 등 곡들의 외형이 다채롭다. 여기에 미니멀한 리듬으로 쓸쓸한 공기를 퍼뜨리는 '눈이 마주친 순간', 전자음이 은은하게 들어간 'Friday야' 같은 노래들로는 현대적인 감각을 아우른다. 과거와 현재의 트렌드를 한데 묶어 놓았다. 박재범, 진보, 개코 등 동료들의 개성을 잘 살린 협업도 앨범을 풍요롭게 한다. 노골적인 슬로 잼 'Give It To Me'에서의 직설과 비유를 적절하게 혼합한 노랫말도 큰 재미를 준다. 무엇보다도 보컬리스트로서의 출중한 능력이 앨범을 멋있게 꾸민다.
박준면 [아무도 없는 방]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는 이는 적을지 몰라도 분명히 많은 이에게 낯익은 배우. 박준면은 그녀가 연기했던 인물들처럼 가수로서도 조용히 다가와 번듯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블루스('낮술'), 재즈('얼음'), 포크('늦여름') 등 대체로 톤이 낮은 차분한 음악을 하지만 고독, 그리움, 절망적인 상황 등을 독특한 어법으로 묘사한 노랫말 때문에 [아무도 없는 방]은 무척 묵직하게 느껴진다. 마치 산문시에 음표를 단 듯한 기분마저 든다. "천변살롱" 등의 뮤지컬을 통해서 준수한 가창력을 드러낸 그녀답게 안정감과 깊이, 곡 특성에 맞는 맛깔스러운 표현력까지 두루 갖춰 감상에 즐거움을 더한다. 수록곡 모두를 작사, 작곡한 사항은 뜨내기식 가수 데뷔가 아님을 힘주어 말한다. 싱어송라이터라는 타이틀이 어울리지 않을 수 없다.
고상지 [Maycgre 1.0]
반도네온의 매력적인 음색을 만끽할 수 있어서 좋으며, 피아노, 바이올린 등 다른 악기들과 녹신녹신하고도 긴밀한 화합까지 이루고 있어 좋은 앨범이다. "정열"이라는 단어와 꼭 붙어 다니는 탱고를 들려주지만 과하지 않은 표현 덕분에 편안하다. 주인공인 반도네온이 무턱대고 나서는 게 아니라 호흡을 가르고 앞자리를 선뜻 양보함으로써 음악에 균형을 잘 맞추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수록곡들은 경박스럽지 않은 경쾌함, 처지지 않는 서정미, 드세지 않은 에너지를 골고루 뽐낸다. 평소 좋아하는 애니메이션들의 주인공과 장면에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밝혔듯 앨범의 수록곡들은 마치 짧은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뚜렷한 짜임새를 나타내 박진감도 제공한다. 확실한 흐름, 선선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를 만족하는 앨범이다.
(한동윤)
원문은 멜론-뮤직스토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www.melon.com/musicstory/inform.htm?mstorySeq=2063
모바일은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해야 볼 수 있습니다.
덧글
올 해 음반들 중에 '1곡' 단위가 아닌 '앨범 전 트랙 단위'로만 가장 많이 들은
앨범을 꼽으라면 단연 이 앨범인지라...ㅎㅎ;;
(그 외에 올해 최악의 앨범은 비, MC몽, 클라라 정도가 떠오릅니다.)
최악의 앨범들을 뽑을까 말까 생각 중인데 시간이 될지 모르겠어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