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가까이에 있는 애증의 이름, 흑인음악 원고의 나열


열심히도 걸어 다녔다. 밥을 굶을 때도 많았다. 스스로 지출에 관대했던 오락실 출입도 줄였다. 이제야 밝히는 것이지만 참고서 구입 명목으로 삥땅도 제법 쳤다. 차비와 식대, 얼마 안 되는 유흥비를 아끼면서, 그리고 부정한 방법까지 동원해 가며 돈을 모았다. 좋아하는 음반을 사기 위해서였다.

한창때에는 동네 레코드 가게를 출근하다시피 들락거렸다. 도장이 점점 늘어나는 쿠폰을 보면서 희열을 느끼고, 몇 장만 더 사면 음반 하나를 공짜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행복해했다. 하지만 즐겨 듣는 흑인음악은 동네 레코드 가게에 많지 않았다. 때문에 주말이면 압구정동의 유명 음반점으로, 지금은 사라진 명동의 파워 스테이션 등으로 출장 구매에 나섰다. 이런 곳들에서 모르던 뮤지션의 음반을 발견하면 적어 뒀다가 나중에 와서 사 가곤 했다. 돌이켜보면 정말 흑인음악 마니아답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흑인음악에 매혹된 순간을 곱씹는다. 사실 딱히 특별한 계기는 없다. 어렸을 때 AFKN을 통해서 우연히 접한 [소울 트레인]에서 흑인들이 흥겹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자연스럽게 소울, 펑크(funk), 디스코에 호감을 갖게 됐다. 그들의 즐거워하는 표정 덕분에 흑인음악은 유쾌한 문물로 인식됐다.

아, 기억을 더 파헤쳐 보면 드라마틱한 감격의 찰나도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나, 역시 AFKN을 보던 중이었다. 가운을 입은 십수 명의 성가대가 노래를 부를 때 몇 명의 래퍼와 가수가 무대에 등장했다. 한 명은 단독으로 랩을 하고 다른 래퍼들은 옆에서 더블링을 하거나 추임새를 넣었다. 함께 나온 가수는 현란한 바이브레이션으로 성가대를 지원했다. 여기에 디제이의 턴테이블 스크래칭도 함께 흘렀다. 합창, 스캣 위주의 보컬, 리드 래핑, 보조 래핑 등 여러 파트가 한꺼번에 나와 어수선할 법도 한데 실제 무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화합이 잘됐고 화려하면서 역동적이었다. 실로 은혜로운 광경이었다. 이름 모를 이들의 공연을 본 그날 흑인음악은 가슴속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후 흑인음악은 1순위 취미이자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 나아가서는 생활의 이정표가 됐다. 다른 장르보다 R&B와 힙합을 즐겨 들은 것은 기본이었다. 학창 시절 특별활동으로 든 팝송반에서 실기 시험을 치를 때 대부분 아이들이 어덜트 컨템퍼러리나 스탠더드 팝을 불렀지만 나는 랩을 했다. 옷은 항상 헐렁하게 입었으며 꼬불꼬불한 파마머리를 고수했다. 20대 때에는 전문 댄서의 길로 인도하기도 했다.

물론 흑인음악과 괜찮은 경험만 나눈 것은 아니다. 간접적이긴 하나 흑인음악은 추간판 탈출증을 선사했으며, 음악과 고된 샅바싸움을 거듭하는 평론가로 살아가게 만들었다. 나는 그토록 애정을 표현했건만 온기 있는 보답은 몇 번 받지 못한 듯하다. 어찌 보면 야속한 존재다.

그럼에도 흑인음악을 언제나 가까이 둔다. 영화 [브라운 슈거]의 주인공이 그랬듯 이따금 지나친 상업화에 실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애정은 쉽게 식지 않는다. 가족 다음으로 가장 오랜 세월을 같이 지낸 벗인 까닭이다. 근사한 흑인음악을 만나면 묘한 즐거움과 알 수 없는 생기가 회복된다. 그래서 오늘도 어김없이 그를 찾는다.

2015/12

웹진 이즘과 빅퍼즐이 공동 주최하는 음악 아카데미 홍보용으로 쓴 글입니다.
http://music.naver.com/promotion/specialContent.nhn?articleId=6539


덧글

  • 슈3花 2016/01/04 15:52 #

    아.. 가슴을 울리는 글이네요. 저도 처음 흑인음악에 빠졌을 때의 그 감성이 되살아 납니다.
  • 한동윤 2016/01/04 20:20 #

    아이구 영광스러운 말씀을 남겨 주시다니!! 그때의 감성, 애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네요 ㅠㅠ
  • 나녹 2016/01/06 14:09 #

    파워 스테이션 오랜만에 듣네요. 저는 이대점에서 인생 첫 CD를 구입했습니다 ㅎ 네이버 메인 축하드려요
  • 한동윤 2016/01/06 20:24 #

    인생 첫 음반을 그런 번화가에서 구입하시다니! 특별하네요!
    축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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