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성 그룹 푸지스(Fugees)의 1994년 데뷔 앨범 [Blunted on Reality]는 명성 있는 레이블 러프하우스 레코드(Ruffhouse Records)를 통해 나왔음에도 이렇다 할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차트에서의 성적도 별로였으며 평단에서도 좋은 평가를 전하지 않았다. 그룹의 존재감을 부각하는 데 완전히 실패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멤버들은 의연했다. 와이클레프 장(Wyclef Jean), 로린 힐(Lauryn Hill), 프라즈(Pras) 모두 곡을 쓸 줄 아는 래퍼이자 보컬리스트였기에 세상이 자신들의 재능을 언젠가는 알아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당장의 상황이 안 좋다고 해도 낙담하고 돌아서지 않을 이유는 충분했다.
러프하우스의 대표 또한 이들 트리오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줬다. 그에게서 앨범 제작비 13만 5천 달러를 받은 푸지스는 악기와 녹음 장비를 사서 와이클레프 장의 친척 집 지하실에 스튜디오를 차리고 다음 작품 제작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세 멤버는 반년 동안 곡을 만들며 힘찬 날갯짓을 준비했다.

무게를 빼며 변화를 감행한 2집
그렇게 완성된 [The Score]는 전작과 다른 표현 방식을 택했다. 사운드는 한결 가벼워지고 침착해져 있었다. [Blunted on Reality]의 'Nappy Heads'와 같은 공격적이고 거친 래핑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데뷔 앨범이 내재한 동부 힙합 특유의 강경한 태도를 잠시 내려 두고 힘을 뺀 편안함으로 대중에게 다가선 것이었다.
노선을 완전히 변경한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힘없고 가난한 아이티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던 와이클레프 장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첫 음반에서 미국 사회에 대해 불편한 심정을 토로했던 것처럼 2집에서도 흑인, 상대적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당하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과격한 언사를 어느 정도 유지했다. 하지만 긍정적이고 밝은 노랫말의 비중을 높이고 부드러운 틀의 음악을 다수 마련해 청중을 향한 접근성을 강화했다.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의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Killing Me Softly'가 전략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유명 팝, R&B 곡을 다시 부름으로써 친숙성을 확보했으며 중간 템포의 힙합 소울로 편곡해 동시에 흑인음악 마니아들의 지지도 얻어 냈다. 와이클레프 장이 맛깔스럽게 재해석한 'No Woman, No Cry'도 원곡이 지닌 인기를 발판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R&B 중창 그룹 델포닉스(The Delfonics)의 'Ready or Not, Here I Come (Can't Hide from Love)'와 뉴에이지 가수 엔야(Enya)의 'Boadicea'를 이용해 멜로디를 보강한 'Ready or Not' 역시 무게를 줄인 제작 방식을 보여 주는 노래다.
푸지스는 또한 'Fu-Gee-La'에서 래퍼로서의 재능을 한껏 과시한다. 세 멤버는 일반적인 래핑과 함께 레게 스타일의 음 높낮이가 확실히 구분되는 플로를 펼쳐 곡의 바운스감을 극대화했다. 이 덕분에 헐렁한 듯하면서도 활동적인 느낌이 스미는 또 하나의 특징을 그룹의 표현법에 등재할 수 있었다.

평단의 찬사와 상업적 성공을 동시에 누리다.
더 편해지고 부드러워진 공법에 따라 탄생한 [The Score]는 그룹에게 데뷔작과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성공을 안긴다. 미국 내에서 6백만 장 이상이 팔렸으며 전 세계적으로 1천 8백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혼성 힙합 그룹으로서는 힙합 역사상 최고의 기록이다.
또한 앨범은 1997년 열린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랩 앨범' 부문을 수상했고 'Killing Me Softly'는 푸지스를 '최우수 R&B 퍼포먼스 듀오, 그룹' 부문의 주인공이 되게 했다. 세계 각국의 음악 매체는 본 작품을 '올해의 앨범' 리스트에 넣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994년에 맛본 패배의 기억은 말끔히 잊히고도 남을 성과였다.
세 멤버는 이 앨범을 만들며 체득한 지식과 방법론으로 이후 솔로 아티스트로서 모두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른다. 와이클레프 장과 로린 힐의 솔로 음반 [The Carnival],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은 [The Score]의 상업적 성공과 평단의 긍정적인 평가를 연장했다. 프라즈 역시 영화 [불워스]의 사운드트랙으로 쓰인 'Ghetto Supastar (That Is What You Are)'로 인기를 누렸다. [The Score]가 장만해 둔 강한 여파였다.
안타깝게도 이제는 완전체 푸지스를 볼 수 없다. 솔로 프로젝트 이후 멤버들은 다시 붙지 않았다. 뛰어난 기량으로 음악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로린 힐은 한 장의 정규 앨범만 발표한 채 공연 위주로 활동하고 있으며 프라즈는 연기와 영화 제작에 몰두하는 중이다. 2010년 아이티 대통령 선거 후보에 출마하려 했던 와이클레프 장은 얼마 전부터 다시 신곡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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