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가 올해로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19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에도 10대들을 멤버로 한 댄스 그룹이 있어 왔지만 이들을 시작으로 회사가 기획, 육성하는 아이돌 그룹 시대가 개막하게 된다. 아이돌 그룹이 범람하는 비정상적 시장 조성에 발단이 되긴 했으나 음반 시장이 커지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공도 있다. 우스갯소리로 "아이돌계의 조상"이라고 일컫기도 하지만 H.O.T.는 90년대 후반 그 누구보다 청소년들과 뜨겁게 소통했다. 지금 들어도 질리지 않는 좋은 노래도 다수인 명실상부한 최고의 그룹이다.
Candy
다섯 명의 10대는 데뷔부터 강한 인상을 남겼다. 1집 타이틀곡 '전사의 후예 (폭력 시대)'는 학원 폭력을 다룸으로써 또래들의 공감을 대대적으로 이끌어 냈다. 장우혁의 거친 래핑, 욕처럼 들리기를 의도했을 강타 파트의 도입부, 힘찬 안무는 청소년들의 응어리를 대신 풀어 주는 듯했다. 또한 Cypress Hill의 'I Ain't Goin' Out Like That' 비트와 Naughty By Nature의 'It's Workin'' 래핑을 보란 듯이 베낀 당당한 표절로도 H.O.T.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표절에 대한 지적은 받았지만 위기는 없었다. 이들은 후속곡 'Candy'로 더 큰 인기를 얻었다. 여자 친구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려고 마음먹었다가 생각을 돌려서 앞으로도 쭉 사랑하겠다는 해피엔드 가사는 다시 한 번 10대들의 정서를 저격했다. 곡은 또 얼마나 밝고 신나는가. 귀에 쏙 들어오는 후렴 멜로디는 부지불식간에 노래를 흥얼거리게 만들었다.
문희준의 "파워레이싱 춤", 장우혁의 "망치 춤" 등 '전사의 후예 (폭력 시대)' 때와는 확 달라진 발랄하고 따라 하기 쉬운 안무를 앞세워 H.O.T.는 더 많은 대중을 홀렸다. 의상은 노래의 콘셉트를 빛나게 해 줬으며 그룹의 이미지를 각인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노래가 크게 히트하면서 1996년 겨울의 거리는 원색의 털모자, 원색의 털장갑, 원색의 털멜빵바지를 입은 청소년들로 알록달록한 물결을 이뤘다.

투지(鬪志) (Get It Up!)
같이 있으면 닮는다는 말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듯하다. 3집부터 멤버들이 작사, 작곡, 편곡에 참여했지만 그룹의 음악감독이었던 유영진의 스타일을 따라가는 경우가 잦았다. 문희준이 만든 '투지(鬪志) (Get It Up!)'이 그 예 중 하나다.
비장함이 깃든 가사, 오케스트레이션, 일렉트릭 기타를 앞세운 록 사운드로 유영진이 기틀을 세운 "SMP"(SM Music Performance) 문법을 충실히 따른다. 하지만 성과는 흉내 내기에 그치지 않는다. 노래는 힙합과 R&B를 기초로 삼으면서 다른 성분들을 이질감 없이 품어 세련미를 과시한다. 더불어 높은 음의 신시사이저 루프를 입혀 지-펑크(G-funk)의 성격도 나타낸다. 도입부에서 '전사의 후예 (폭력 시대)'를 비슷하게 되새김질한 것이 유일한 흠이다.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
강타가 없었다면 이 노래는 H.O.T.의 이름으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브리지에서의 비브라토가 균열에 가깝긴 하지만 강타의 깔끔하고 시원한 가창력 덕분에 근사한 R&B 곡을 디스코그래피에 기재하게 됐다. 유영진은 이 노래를 통해 가수 시절 자신이 마음껏 펼치지 못한 R&B 장르를 많은 이에게 들려줄 수 있었다. 작곡가 유영진과 노래를 부른 H.O.T.에게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은 상부상조의 작품이 됐다.
아이야! (I yah!)
모차르트의 '교향곡 25번 G단조 K.183 1악장'을 바탕으로 한 외골격과 베토벤의 '월광' 곁들임, 디스토션을 가한 전기기타 연주, 고함을 지르는 것 같은 래핑, 어두운 가사를 버무린 SMP 대표곡이다.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산조풍의 빠른 장단을 구사해 우리 전통음악과의 퓨전까지 행한다. 때문에 '아이야! (I yah!)'는 SMP의 포용 범위가 넓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자리이기도 하다.
노래는 1999년 6월 발생한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 사건"을 추모하는 의미로 만들어졌다. 사망자 23명 가운데 유치원생이 19명이나 돼서 국민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노래가 나온 지 17년이 지난 지금도 부주의와 부실 공사로 말미암은 인명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 사고의 희생자가 청소년들이면 이 노래의 가사가 떠올려진다. "피우지도 못한 아이들의 불꽃을 꺼버리게 누가 허락했는가 언제까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반복하고 살텐가"
H.O.T.는 이런저런 사건, 사회문제를 조명하는 노래들을 꽤 많이 선보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사회성 짙은 노래들로도 큰 인기를 얻자 공적 메시지를 품은 노래가 많이 나왔다. 아이돌이었던 H.O.T.도 이 풍토를 따랐다. 요즘 아이돌을 보면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About 여자(女子)
"아니, 이 노래를 왜?" 굉장히 뜬금없다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듯하다. 엉뚱한 선정이라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히트하지도 않았으며 작품성이 그렇게 높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H.O.T.의 이 리메이크를 통해 SM 엔터테인먼트의 초기 댄스 그룹 J & J의 궤적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게 됐다. '미지수야 미지수'인 원곡 제목을 많이 틀었지만 원곡의 MR을 그대로 쓴 성의 없는 노래이기도 하다. 노래방에서 부르는 수준이다.
Do Or Die
3집 중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 (Boys, Be A Legend!)'를 통해 작곡가 직함을 단 장우혁은 4집에서 두 번째 자작곡 'Do Or Die'를 선보이며 작곡 역량을 선전했다.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는 래핑이 전반을 차지했던 반면에 이 노래는 R&B 스타일의 멜로디가 중심이 됐다. 군더더기 없이 그루비한 비트가 반을 먹고 들어가지만 화성이 자연스럽고 나긋나긋해서 장우혁을 다시 보게 만든 작품이다.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흑인음악을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단번에 호감을 살 장우혁 최고의 노래다. 자기를 떠난 애인을 원망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아이돌 그룹 노래에서 "Bitch"는 좀….
행복
H.O.T.는 2집에서도 센 힙합을 먼저 풀었다. 타이틀곡 '늑대와 양'의 학원 폭력을 암시하는 가사 또한 그룹이 이전의 방식을 반복하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달라진 것은 '전사의 후예 (폭력 시대)' 때보다 더 화려하고 격해진 일부 멤버의 헤어스타일과 사이버 시대의 전사를 상상하며 만든 듯한 그로테스크한 장신구뿐이었다. H.O.T.의 팬들에게만큼은 멋있게 보였을지 몰라도 신선하다는 느낌은 확실히 들지 않을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룹은 1집과 동일한 전략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후속곡으로 민 '행복'은 다수가 즐길 수 있는 경쾌함을 어필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크리스마스캐럴 'Angels We Have Heard On High'의 멜로디를 써서 친근함을 확보한 것도 성공 요인이었다. "닭싸움", "탱크놀이", "캉캉" 등 'Candy'에 준하는 아기자기한 포인트 안무도 히트를 도왔다.
이 노래로 방송 활동을 할 때에 H.O.T.는 큼지막하긴 해도 럭비 티셔츠, 솔리드 셔츠 같은 무난한 옷을 무대 의상으로 택했다. 특이하지 않음으로 이들의 패션을 따라 입는 이가 'Candy' 때보다 더 많았다. '행복'은 1990년대 후반의 힙합 패션 일등 전파자이기도 했다.

We Are The Future
이 노래는 테크노 샘플 CD에 담긴 소스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여기에 독일 전자음악 밴드 Kraftwerk의 대표곡 'Tour De France'를 가져와 살을 보탰다. 중심 루프는 일본 애니메이션 "슬레이어즈"의 오프닝 노래 'Give A Reason'을 빼다 박았다. 'We Are The Future'는 3할은 샘플링, 3할은 표절로 제작한 노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미스러운 점이 버젓이 존재하지만 10대들을 위한 낙관적인 메시지를 담았다는 점에서 그 아쉬움이 조금은 줄어든다. 단순한 소비 지향적인 댄스음악이 아닌 공감대를 형성하는 매개체로서의 위상을 확보한 노래다.
노래는 멤버의 솔로 댄싱 파트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는 것으로도 특별함을 갖는다. 멤버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노래는 간혹 나왔으나 춤을 추라고 멍석을 깔아 주는 것은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유례없는 일이었다.
H.O.T.는 'We Are The Future'로 방송 활동을 할 때 라이브를 거의 하지 않았다. 각 음악 방송의 사정도 있었겠고 안무가 워낙 격해서 실제로 노래를 부르기가 벅찬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은 MBC에서 라이브를 한 적이 있다. 이때 춤도 평상시처럼 추면서 흐트러짐 없이 라이브를 소화했다. 심지어 화음에 비트박싱까지 넣어 가며 색다른 무대를 선사했다. 문희준과 강타의 공이 큰 공연이긴 했으나 이들이 날림으로 완성된 그룹이 아님을 증명한 공연이었다.
Outside Castle (The Castle Outsiders)
그룹 활동 마지막에 가서 멤버들은 유영진의 도움 없이 온전히 자기들 힘으로 앨범을 완성한다. 따라서 5집은 작품성을 떠나 엄청난 성과를 보여 준 음반으로서 의미가 깊다. 문희준이 작곡, 편곡한 'Outside Castle (The Castle Outsiders)'는 오밀조밀하게 펼쳐지는 베이스라인으로 Timbaland을 흉내 냈다. 하지만 장엄함을 의도한 현악기 편곡은 유영진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일러 준다.
빛 (Hope)
유영진-장용진으로 연결되는 선곡은 아니었으나 그룹은 3집에서도 거친 노래-밝은 노래의 활동 공식을 이어 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풋풋하고 달콤한 사랑 얘기가 아닌 희망에 관한 내용으로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의 아픈 마음을 보듬었다.
따뜻한 위로가 되는 가사 외에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환희의 송가'를 빌린 멜로디도 대중성을 뒷받침해 준다. 강타도 클래식으로 친밀감을 띠는 방식을 어깨너머로 습득한 것. 저작권료를 내지 않아도 되고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으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빛 (Hope}'는 H.O.T.에게도 찬란한 빛이 됐다.
멜론-멜론매거진-이슈포커스 http://www.melon.com/musicstory/inform.htm?mstorySeq=4031&startIndex=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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