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요 원곡 컬렉션, 배호, 남인수 원곡 규명 캠페인 원고의 나열


* 국립중앙도서관-KBS-로엔 공동 프로젝트
데이터를 구축, 정리하는 작업은 두말할 필요 없이 무척 중요하다. 방대한 자료를 충분히 취합할 때 낱낱의 사실은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이야기를 완성한다. 일목요연한 정리는 이렇게 이뤄진 커다랗고 장구한 자취를 어려움 없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 준다. 인물 또는 사건과 상황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고 추리는 것은 곧 올바른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중가요에 대한 반듯한 갈무리는 더욱 요긴하다. 많은 사람이 관심과 애정을 갖는 분야이며 일상적으로 접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발달, 이에 따른 음악 사이트와 팬 커뮤니티의 활성화로 동시대의 음악은 상당한 정보와 비교적 정확한 사실을 축적해 놓고 있다. 하지만 매체가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던 시절에 나온 대중음악은 그렇지 못한 상태다. 때문에 열심히 과거의 기사와 문헌을 검색해도 정보에 혼돈이 올 때가 허다하다. 답답하고 애석할 따름이다.


특히 옛날 노래들 중에는 오리지널인지, 리메이크인지 명확히 판명되지 않은 채 출시되는 작품도 제법 된다. 널리 애청되는 노래를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난 가수한테 빈번하게 발생하는 문제다.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들었던 노래들이 원곡이 아닌 경우가 의외로 많은 것이다.

이와 같은 허위 음반으로 인한 아쉬움과 허탈감을 달래 줄 활동이 실시된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원곡 음원을 제대로 보급하고 이용과 보존의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취지로 주요 대중가수의 원곡과 리메이크를 정확히 구분하고 명시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요절한 탓에 커버 작품 발매가 많이 이뤄졌던 대표 가수 남인수, 배호를 선정해 원곡을 규명하고 복원할 예정이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이 작업을 위해 남인수의 노래 180편, 배호의 노래 314편, 총 494곡을 선별했다. 이에 전문가 청음위원회를 조직, 청음을 통해 발매된 노래들의 오리지널 여부를 판별했으며 이 가운데 진위가 불명확한 18편의 노래는 성문분석을 통해 감정했다. 판별된 노래들은 원곡과 커버곡 각각 음원 복각이 진행된다. 또한 자료 보강을 위해 개인이 소장한 음원을 추가로 수집하기로 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멜론이 진행하는 원곡 컬렉션 프로젝트를 통해 음악팬들은 앞으로 바르게 검증된 음원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이번 사업은 저작권에 관한 인식을 환기하는 계기도 될 듯하다. 우리 대중음악의 걸출한 인물을 새롭게 만난다는 것도 소중한 의미로 다가온다.


국민과 호흡한 1세대 가왕 남인수
이난영과 함께 1930, 40년대 가요계를 풍미한 남인수는 요즘으로 치면 정상급 아이돌이나 다름없었다. 공연이 끝나면 기생집에서 보낸 인력거들이 공연장 앞에 줄을 설 정도였다. 기생뿐만 아니라 양갓집 딸들도 그를 흠모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맑고 또랑또랑한 음성도 매력적이었지만 훈훈한 외모로도 많은 여성의 마음을 흔들었다.

본명은 강문수로, 1918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남인수는 1936년 시에론 레코드에서 '눈물의 해협'을 취입하며 데뷔한다. 같은 해 오케 레코드로 이적해 발표한 '범벅 서울'로 열여덟 살의 앳된 가수는 빠르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듬해 낸 '물방아 사랑'이 히트하면서 남인수의 인지도는 급상승했다. 이 노래의 성공으로 작곡가 박시춘과의 협업이 쭉 이어지게 된다.


남인수는 쉼표 없이 승승장구했다. 1938년에 발표한 '애수의 소야곡'은 전국적으로 애청되며 남인수를 톱스타로 만들어 줬다. 1939년에 선보인 '청춘야곡'은 "제2의 '애수의 소야곡'"이라는 소개가 붙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는 듯한 희망찬 가사와 밝은 곡조가 특징인 '감격시대' 또한 대박을 터뜨려 남인수는 당대 최고의 가수로 확실히 자리매김한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는 중에도 남인수의 인기와 입지는 견고했다. '가거라 38선', '이별의 부산 정거장', '산유화', '무너진 사랑탑' 등 히트 행진이 계속됐다. 그 시절 대중음악계에서 남인수의 존재는 단연 빛났다.

1962년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남인수는 부단히 음반을 취입했다. 그가 부른 노래는 약 1천여 편에 이른다고 한다. 하지만 다작이 남인수를 스타로 만든 일등 요인은 아니다. 남북 분단에 따른 민족의 아픔을 녹여낸 '가거라 38선',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의 피난살이에 대한 감정을 담은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 남인수의 노래는 국민과 호흡했기에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삶과 감정을 교류하는 노래로 그는 대중에게 기쁨과 슬픔, 감동을 선사했다.


중후함과 친숙함을 겸비한 독보적 존재 배호
1960년대 후반 이름을 드날린 배호는 많은 이에게 단정한 신사 이미지로 기억된다. 말쑥한 정장 차림, 네모반듯한 금테 안경, 종종 쓰는 중절모는 배호의 외적 특징이었다. 이러한 패션으로 그는 지적이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당시 여성 팬들 중에는 앨범 커버에 담긴 그의 사진 때문에 좋아하게 됐다는 이도 많았다.

배호는 또한 드럼 치는 가수로서도 이목을 끌었다. 드러머이면서 노래까지 하는 인물은 대중음악계에서 흔치 않았기 때문에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1942년 중국 산동성에서 태어나 1946년 서울에 정착한 그는 중학교 시절 외삼촌 김광빈을 통해 드럼을 배웠다. 고등학생이었던 1950년대 후반부터 김광빈 악단에서 드럼을 연주하며 뮤지션으로서 첫발을 내디뎠고 1960년대 들어 미군부대 관할 클럽 등에서 활동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김광빈 악단과 김인배 악단에서 드러머 겸 보컬리스트로 활약한 배호는 1963년 '굿바이'를 취입하며 솔로 가수로 데뷔한다. 이듬해에는 낙원동에 위치한 카바레에서 12인조 밴드를 구성해 밴드 마스터로서, 노래하는 드러머로서 존재감을 알려 나갔다. 이 시기 '두메산골', '황금의 눈' 등을 발표하면서 음반 활동도 병행했다.


1966년 나날이 인지도를 올리던 차에 갑자기 제동이 걸렸다. 신장염이 생겨 정상의 컨디션으로 활동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누가 울어', '안개 속으로 가 버린 사랑' 등을 투병 중에 녹음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배호는 음악을 놓지 않았다. 1967년에는 '돌아가는 삼각지'가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순식간에 스타로 떠올랐다. 같은 해 '안개 낀 장충단 공원'도 연달아 큰 사랑을 받았다. 이 노래들로 "MBC 10대가수상", "TBC 방송가요대상" 등 여러 음악 행사에서 트로피를 거머쥐게 된다.

다행히 건강도 어느 정도 회복됐고 배호는 왕성하게 공연 활동을 벌인다. 하지만 완쾌된 것은 아니었다. 신장염이 재발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야 했다. 그럼에도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꾸준히 음반을 발표했으며 방송, 업소에서의 공연을 이어 갔다. 무리하게 스케줄을 소화하던 배호는 건강이 악화돼 1971년 11월 7일 2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배호는 스탠더드 팝과 트로트를 아우르며 고급스러움과 구수함을 함께 전달했다. 중후한 음성과 고음에서 톤이 바뀌는 독특함,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은 아직도 많은 음악팬의 기억에 남아 있다.

멜론-멜론매거진-이슈포커스 http://www.melon.com/musicstory/inform.htm?mstorySeq=4206&startIndex=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