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롤러스케이팅이 만났을 때 원고의 나열

우리 대중문화 한편은 부단히 과거를 소화한다. 복고의 첨병 역할을 한 "응답하라" 시리즈는 2, 30년 전에 유행했던 더플코트와 청재킷을 다시 인기 패션으로 자리 잡게 했다. 이 분위기를 타고 1990년대 젊은이들의 필수 액세서리였던 야구모자도 트렌드로 등극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다시피 한 LP가 판매량을 높이는 중이며, 카세트테이프로 음반을 제작하는 사례도 느는 추세다. 어느 순간 홀연히 나타난 과거는 놀라운 마력으로 대중을 사로잡고 있다.

롤러스케이트도 돌아왔다. 1980, 90년대에 큰 사랑을 받았던 롤러스케이트장이 최근 속속 생겨나고 있다. 서서히 점포를 늘려 가는 롤러스케이트장은 중장년들에게는 추억을 회복할 통로로서, 젊은 세대에게는 새로운 놀이 공간으로서 관심을 이끌어 낸다. 롤러스케이트장의 복귀를 마주하니 인라인스케이트에 20여 년 동안 밀려나 있던 롤러스케이팅이 지금의 붐에 힘입어 취미 활동, 스포츠의 지분을 차지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언제나 맑음 | 고상한 롤러스케이팅의 진수
피겨스케이팅과 마찬가지로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춤을 추는 듯한 동작이 가능하다는 점으로 롤러스케이팅은 음악영화, 혹은 영화 속 댄스음악이 흐르는 장면과 긴밀한 인연을 맺어 왔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댄서 겸 배우 Gene Kelly가 주연한 1955년 영화 "언제나 맑음"(It's Always Fair Weather)이다.


Gene Kelly는 1951년 "파리의 미국인"(An American In Paris), 1952년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 In The Rain)를 통해 뛰어난 춤꾼임을 입증했다. 이 영화들에서의 춤은 화려함과 익살스러움에 치중했지만 "언제나 맑음" 중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I Like Myself'를 부르는 장면은 우아함을 풍겼다.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한 걸음, 한 걸음 부드럽게 내딛는 모습은 은반을 활보하는 피겨 요정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이 신에서 그는 롤러스케이트를 신은 채 탭댄스까지 선보인다. 지면과의 마찰이 적은 롤러스케이트로 발을 구르면서도 삐끗거림 없이 춤을 추는 모습은 실로 경이롭다. 보도블록과 차도를 옮겨 가는 널따란 동선, 여유로움과 우스꽝스러움을 번갈아 가며 내비치는 표정 연기는 이 신을 더욱 근사하게 만든다. 그의 춤을 보고 나면 영화 속 엑스트라들처럼 자동으로 박수를 치게 된다.


Gene Kelly의 롤러스케이팅 퍼포먼스는 후배 예술인들한테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RJD2가 2007년에 발표한 'Work It Out' 뮤직비디오는 Gene Kelly를 향한 오마주였다. 선천적인 병을 극복하고 목발을 이용한 춤을 추는 댄서 Bill Shannon은 이 뮤직비디오에서 목발을 다리와 탈것 삼아 거리 곳곳을 누빈다. 편안하게 옷을 입었지만 정장 재킷과 넥타이, 중절모를 갖춰서 "언제나 맑음" 속 Gene Kelly를 흉내 내는 데 공을 들였다.

제너두 | 화려한 롤러스케이팅의 대표작
롤러스케이팅을 중심 소재로 택한 최초의 음악영화는 1979년 개봉한 "롤러 부기"(Roller Boogie)였다. 하지만 대다수 음악팬의 기억에 깊게 들어선 영화는 이듬해 개봉한 "제너두"(Xanadu)일 것이다. 가수로서 잘나가고 있었으며, 1978년 "그리스"(Grease)를 통해 할리우드의 공주가 된 Olivia Newton-John이 주연을 맡았기 때문이다. 수익은 형편없었고, 평론가들로부터 혹평까지 들었으나 그녀의 출연 덕에 작품은 잊히지 않고 있다.


영화의 박스오피스 성적이 나락으로 치달았던 것과 달리 사운드트랙은 대성공을 거뒀다. 'I'm Alive', 'Magic', 'Xanadu', 'Suddenly' 등 앨범에서 싱글로 뽑은 다섯 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 20위 안에 들었다. Olivia Newton-John와 사운드트랙을 함께한 Electric Light Orchestra가 영국 뮤지션이었기에 이들 노래는 영국 차트에서도 상위권에 올랐다.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는 Olivia Newton-John이 주제곡 'Xanadu'를 부르는 신이다. 노래가 디스코풍이라서 기본적으로 신이 나는 데다가 많은 댄서가 일사불란하고 현란하게 움직여 흥을 더욱 돋운다. 그야말로 잘 짜인 뮤지컬을 감상하는 듯하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기 전 수십 명의 조연이 무대 주변을 돌며 추는 롤러스케이트 군무는 예열 작업을 톡톡히 한다. 이때 성공한 사업가 역을 맡은 Gene Kelly가 스케이터 무리를 이끈다. "언제나 맑음"에서의 젊은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는 유연한 라이딩으로 롤러스케이팅 실력은 전혀 녹슬지 않았음을 과시한다.

롤 바운스 | 열기 충만한 롤러스케이트 댄싱
새천년으로 넘어오면서 옛 시절을 그리워하기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Bow Wow, Nick Cannon 등이 출연한 2005년 영화 "롤 바운스"(Roll Bounce)는 롤러스케이팅이 청소년들의 대표 놀이 문화로 자리매김한 1970년대 후반의 풍경을 담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청소년물이다 보니 친구들 간의 우정과 갈등, 사랑 등 전형적인 구성으로 점철되긴 하지만 이 무난함으로 영화는 그럭저럭 성공을 거뒀다.


롤러스케이트장이 주된 배경이라서 영화에는 롤러스케이트장의 디제이가 트는 경쾌한 음악이 시종 흐른다. 당시, 또는 그보다 먼저 출시돼 히트한 솔뮤직, 디스코, 펑크(Funk) 명곡들도 반갑지만 영화의 사운드트랙도 꽤 준수하다. Al Green의 원곡을 Michelle Williams가 부른 'Let's Stay Together', Kool & The Gang의 오리지널을 Jamiroquai가 리메이크한 'Hollywood Swinging' 등도 영화를 보는 재미를 곱절로 만든다.

품행제로 | 팬심으로 물든 롤러스케이트장
우리나라에서는 류승범이 주연한 "품행제로"가 롤러스케이트장의 풍경을 담은 바 있다. 영화 속 롤러스케이트장 시퀀스는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디제이의 선곡 때문에 빚어지는 불화를 주된 내용으로 한다.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믿기 어려울 상황이지만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80년대 중반을 사실적으로 나타내 웃음을 자아낸다


2015년 MBC "복면가왕"에 출연해 다시금 관심을 받았던 김승진은 고등학교 2학년인 1985년에 데뷔했다. 솔직히 가창력은 그리 좋지 못했지만 1집에 실린 '스잔'이 청소년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럭저럭 말쑥한 외모, 비슷한 또래라는 점도 소녀들의 열띤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 한몫했다. 김승진은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타가 됐다.

이듬해에는 또 다른 고교생 가수 박혜성이 데뷔한다. 그는 '경아'를 타이틀곡으로 내세워 여자 이름의 제목으로 성공한 김승진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박혜성 역시 곱상한 외모 덕에 금세 큰 인기를 끌게 된다. 박혜성의 등장 이후 당시 10대 소녀들은 '스잔 파'와 '경아 파'로 갈렸다.


영화는 이 라이벌 구도를 반영하고 있다. 롤러스케이트장에 놀러 간 민희(임은경 분)와 친구들은 '스잔'이 흐르자 노래를 따라 부르며 손을 흔든다. 이를 본 나영(공효진 분)과 친구들은 디제이한테 가서 '경아'로 바꿔 틀라면서 협박한다. 나영이 골을 부리는 것은 중필(류승범 분)이 민희를 좋아하는 사실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나영의 행동에는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긴 했지만 H.O.T.와 젝스키스 팬들, S.E.S.와 핑클의 팬들이 경쟁심을 품었던 것처럼 저 시절 김승진과 박혜성 팬들의 기 싸움도 대단했다.

롤러스케이팅은 유로팝과 함께
올해 초 개봉한 "더 킹"에서도 롤러스케이트장이 배경으로 등장했다. 공부를 잘해서 검사가 되고 싶었지만 수업 시간만 되면 이상하게 무기력해지는 박태수(조인성 분)는 어느 날 롤러스케이트장에서 만화책을 보는 아이들을 목격한 뒤 시끄러운 장소에서도 책을 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가 롤러스케이트장에서 공부할 때 London Boys가 1987년에 발표한 'Harlem Desire'가 흐른다.


이 장면은 우리나라에서 롤러스케이트장이 성황을 이루던 순간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당시 롤러스케이트장의 1등 배경음악은 유로팝이었다. MBC "라디오스타"의 시그널뮤직으로 익숙한 Modern Talking의 'Brother Louie', 영화 "써니" 중 써니와 소녀시대가 시위대에 휩쓸려 싸움을 벌일 때 흐르던 Joy의 'Touch By Touch', 1980년대 화장지 CF 배경음악으로 쓰였던 Baltimora의 'Tarzan Boy' 등 한국 롤러스케이트장은 유로팝의 전파자나 다름없었다. 롤러스케이트장의 컴백이 유로팝의 부흥으로 이어질지, 이 또한 궁금하다.

멜론-멜론매거진-이슈포커스 http://www.melon.com/musicstory/inform.htm?mstorySeq=4970&startIndex=0

덧글

  • 바람뫼 2017/06/05 16:37 #

    저는 롤러 스케이트 하니까 롤러 볼이 떠오르네요.

    롤러장은 어렸을 때 사촌 형 손에 이끌려 딱 한번 따라가 봤습니다. ㅎㅎ
  • 한동윤 2017/06/05 23:06 #

    롤러볼을 보셨군요? 나름대로 레어한 영환데ㅎㅎ
    사촌 형께서 어둠의 길로 인도할 뻔했군요. 롤러장은 너무 양아치 소굴이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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