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의 또 다른 첨병 VHS 비디오테이프 원고의 나열


무척 인상적이었다. 걸 그룹 f(x)는 2013년에 출시한 정규 2집의 포장을 이제는 사라지다시피 한 비디오테이프 모양으로 구성했다. 영화의 주요 장면을 추려 놓은 듯한 멤버들의 사진과 이런저런 소개 문구로 채워진 뒷면은 영락없이 그 옛날 비디오테이프 케이스 같았다. 실제 비디오테이프가 들어 있지는 않았지만 분홍색 위주로 꾸며서 [Pink Tape]라는 제목에 딱 들어맞는 외관을 완성했다. 남다른 패키지 덕에 앨범은 확실히 튀어 보였다.

어떤 이들은 f(x)의 앨범을 보고 추억에 잠겼을지도 모르겠다. 비디오테이프는 퍼스널 컴퓨터 보급이 급물살을 탄 1990년대 후반부터 영상을 담는 콤팩트디스크 VCD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그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기록할 수 있는 DVD와 블루레이가 영상의 차세대 저장 매체로 빠르게 부상하면서 비디오테이프는 순식간에 경쟁력을 상실하게 됐다. 미국, 일본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2000년대 중반부터 비디오테이프 생산을 사실상 중단했다. 때문에 앨범 커버 디자인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반갑게 느껴졌을 듯하다.

비디오테이프로 보는 기분이 드는 뮤직비디오
f(x)는 물질의 형태로 비디오테이프를 불러냈지만 외국에서는 뮤직비디오를 통해 비디오테이프 시절로 복귀하는 움직임이 이미 활발하다. 이에 해당하는 작품들은 화면 떨림 현상을 들이는 등 의도적으로 화질을 안 좋게 연출한다든가 비디오테이프를 전용 재생기에 넣었을 때 나오는 안내 글로 "VHS"(Video Home System: 일본 전자제품 기업 JVC가 개발한 가정용 비디오테이프 표준 규격)를 흉내 낸다. 파란 대기 화면, 낮은 선명도, 가끔씩 깔리는 노이즈바, 딱딱한 글씨체 등은 보는 이의 체감 시대를 수십 년 전으로 돌려놓는다.


어떤 작품이 이런 기법의 시초인지는 뚜렷하지 않다. 외국에서도 복고 바람이 불기 시작한 2010년을 전후해 생겨났다고 어림짐작할 뿐이다. 그중 하나가 Mark Ronson이 2010년 Mark Ronson & The Business Intl.이란 이름으로 낸 'Bang Bang Bang' 뮤직비디오다. 영상은 해상도가 떨어지는 인터뷰 장면을 내보낸 뒤 Mark Ronson의 악기가 세팅되는 과정을 198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일본의 변신 로봇 애니메이션처럼 구성해 VHS 시대를 되새김질한다. 이때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는 상시적 통로는 텔레비전과 비디오테이프밖에 없었다.


뮤직비디오의 마지막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노래가 끝난 뒤 영상은 스포츠 중계로 채널이 돌아간 상황으로 계속된다. Mark Ronson이 테니스 선수로 분장해서 경기를 치르는 장면이 펼쳐지는데, Mark Ronson은 경기가 마음대로 잘 풀리지 않자 휴식을 취하는 자리 옆에 놓인 물컵을 손으로 쳐서 흩트려 놓는다. 라켓도 집어던지고 헤어밴드도 마구 풀어헤친다. 이때 그의 의자 뒤에는 큼지막한 "소니"(Sony) 로고가 자리해 경기 협찬사임을 나타낸다.


베타맥스 비디오테이프


소니는 JVC보다 1년 앞선 1975년 "베타맥스"(Betamax)라는 가정용 비디오테이프 포맷을 선보였다. 베타맥스는 VHS보다 크기가 작고 화질도 좋았다. 하지만 VHS보다 재생시간이 많이 짧은 점이 흠이었다. 따라서 영화, 애니메이션 제작자들로서는 VHS를 선호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 치명적 약점으로 베타맥스는 먼저 출시됐음에도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VHS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뮤직비디오 속 Mark Ronson의 분개는 당시 소니가 느낀 패배감을 대변하는 세밀한 설정이다.

음악팬 다수가 기억하는 VHS 효과는 Bruno Mars가 2013년에 낸 'Treasure'일 듯하다. 곡의 형식이 1970년대에 유행했던 디스코이다 보니 Bruno Mars는 노래가 지닌 시대적 정서를 극대화하기 위해 뮤직비디오도 그때 느낌을 살려서 제작했다. 의상과 시각효과 모두 촌스럽게 재현했다. 화질도 당연히 흐릿하고 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과거의 복원이 지나치게 훌륭했던 나머지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뮤직비디오가 공개됐을 때 많은 사람이 정식 뮤직비디오가 아닌 가짜 영상으로 여겼다. 국제적 스타의 뮤직비디오치고는 너무나 조악해 보였기 때문이다.


VHS를 흉내 낸 뮤직비디오는 1970, 80년대에 대세를 이뤘던 디스코, 신스팝 같은 장르가 다시 인기를 얻으면서 점차 확산되는 추세다. 독일 일렉트로닉 뮤지션 Roosevelt가 2013년에 낸 'Montreal', 미국 싱어송라이터 Bonnie McKee가 2015년에 출시한 'Bombastic'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Ty Dolla $ign의 'Blase', Teen의 'Free Time', Danny Brown의 'When It Rain', Incubus의 'Nimble Bastard' 등 힙합 뮤지션이나 록 밴드들도 VHS 형식 뮤직비디오 제작에 뛰어드는 중이다.

가요계에서도 VHS 애정이 번성하는 중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45RPM의 '붐박스', 슬리피의 '바디로션', 박재범과 기린이 함께 부른 'City Breeze', 시크릿 아시아 맨의 'I Want You Back', 비하트 '실감 나' 등 비디오테이프 질감을 낸 뮤직비디오가 최근 부쩍 많이 만들어지는 형국이다. 올해 3월 검정치마가 컴백을 예고하며 발표했던 '내 고향 서울엔'의 뮤직비디오 또한 1980년대 서울의 풍경을 담은 비디오테이프 클립으로 VHS 리바이벌 붐의 부피를 키웠다.


이달 초 걸 그룹 이달의 소녀 1/3이 선보인 '비의 목소리 51db (Rain 51db)' 뮤직비디오 또한 VHS 방식을 충실히 재현했다. 그동안 공개했던 멤버들의 뮤직비디오를 채널 돌리듯이 짧게 틀 때 오래된 비디오테이프처럼 일부러 화면을 구부리는가 하면, 스캔 라인을 삽입해 구식 브라운관 텔레비전으로 화면을 보는 느낌이 들도록 연출했다. 각진 폰트와 옆으로 흐르는 노래 설명은 1990년대 후반에 방송됐던 MBC "생방송 음악캠프"를 향한 오마주나 다름없다.


이런 작품들의 효시는 이윤정, 이현준 부부의 종합 예술 프로젝트 EE다. 부부가 2008년에 낸 'Curiosity Kills'는 신스팝을 음악적 골격으로 했다. 노래의 뮤직비디오는 비디오테이프 캠코더 촬영 방식을 나타내 곡의 시대성을 부연하는 동시에 1980년대의 향기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EE를 비롯한 출연자들은 그 시절이 생각나는 옷을 입어 과거의 정취를 한 번 더 확실히 자아냈다. EE는 2009년 발표한 정규 앨범 타이틀곡 '기억 속의 하이칼라' 뮤직비디오에서도 VHS 화질을 의도해 보였다.

VHS 스타일은 언제까지 유행할까?
과학기술이 빠르게 발달함에 따라 우리는 전보다 훨씬 선명한 화질로 영상을 감상할 수 있게 됐다. Full HD는 보편화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그보다 네 배 이상 화질이 좋은 Ultra HD 시대가 도래했다. 화장을 곱게 해도 모공이 보일 만큼 선명한 화면을 마주하게 됐다. 이 와중에 많은 아티스트가 화질을 떨어뜨린 작품을 선보이는 것은 지금의 영상 트렌드인 과도한 깔끔함에 대한 (장난기 어린) 반발심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 같은 활동의 가장 중대한 밑바탕은 과거에 대한 향수다. 비디오테이프를 경험했던 세대는 지지직거리는 화면과 노이즈를 통해 옛 기억을 반추한다. 단순히 만화나 영화를 봤던 일만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 젊었을 때 전반을 다시금 머릿속에서 되살린다. VHS가 돌아가고 싶은 과거를 연결해 주는 매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비디오테이프에 추억을 갖고 있지는 않다. 비디오테이프가 2000년대 중반부터 자취를 감췄으니 이때 서너 살쯤이던 사람이나 이 시기 이후에 태어난 세대 중에는 비디오테이프를 모르는 이가 태반일 것이다. 이들은 현재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핵심 음악팬이다. 따라서 VHS를 흉내 낸 뮤직비디오는 대중음악 수요층의 절반 정도만 고려한 국지적 작풍이라 할 수 있다. 전 세대의 호응을 얻기에는 어려운 방식이 과연 선명한 트렌드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외국은 상관없지만 국내 VHS 화질의 뮤직비디오를 볼 때마다 허전한 느낌이 든다. 중요한 것이 빠졌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사람이 비디오테이프를 볼 때마다 이 부분에서 설렜을 것이다. 특정 장면에서 화면을 정지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다음에 누군가가 VHS 스타일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게 된다면 추억이 더욱 살아나게 고전 안내문을 넣어 줬으면 한다.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 불법 비디오를 시청함으로써 비행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우수한 영상 매체인 비디오를 바르게 선택 활용하여 맑고 고운 심성을 가꾸도록 우리 모두가 바른 길잡이가 되어야겠습니다. 한 편의 비디오, 사람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멜론-멜론매거진-이슈포커스 http://www.melon.com/musicstory/inform.htm?mstorySeq=5225&startIndex=0

덧글

  • 로그온티어 2017/07/20 16:53 #

    유행보다는 그저 한켠에 자리잡았다는 게 맞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베이퍼웨이브처럼 장르가 된 거죠.
  • 한동윤 2017/07/24 11:57 #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점점 늘어날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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